공감하는 존재들의 연대
2018년 5월 15일, 나의 소중한 고양이 새촘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나와 새촘 이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새촘이는 의사들의 손에서 숨이 넘어가는 그 때에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엄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는 새촘이에게 ‘별일 아닐 거야, 새촘이 건강해질 거야’라 고 응답했다. 나는 정말 별일이 아닐 줄 알았다. 새촘이가 그렇게 영영 떠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다. 회복하는 중이었는데, 괜찮다고 했는데, 새촘이의 마지막은 의료사고였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 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것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세차게 저으면 그 생각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2월의 어느 목요일, 오보이의 김현성 편집장과 마주 앉았다. 소소하게 하고 있는 캣맘 역할과 반려 고양이와 살고 있는 덕분에 연결된 만남이었다. 김현성 편집장은 나에게 물었다. ‘고양이 밥, 왜 챙겨주세요?’ 준비한 적 없던 말이 입 밖으 로 툭 튀어나왔다. ‘걱정돼서요.’ 내가 한 말이지만 낯설었다. 아, 나 걱정되어서 밥 주고 있었던 거였구나. 말을 해 놓 고 서서히 깨달았다. 나는 고양이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김현성 편집장이 말했다. “제가 오보이를 10년쯤 해오고 있 잖아요. 근데 하면서 점점 더 궁금해지는 거예요. 왜 여성일까? 고양이를 챙겨주는 사람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 은 왜 대부분 여성일까. 동물을 돌보고 챙기는 사람들은 어째서 대부분 여성인 걸까요?” “아.. 그러게요. 정말 그렇네 요.” 나는 그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겨진 질문은 나의 몫이 되었다. 왜 대부분 여성일까? 왜 그런 걸까?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에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공원엔 멀리서 본 적만 있을 뿐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캣맘들이 있다. 부지런한 캣맘들은 아이들의 밥그릇이 비워질세라 사료를 두둑하게 채워주고 깨끗한 물도 수시로 갈아준다. 나는 가끔 그 자리에 사료를 보태고 물을 갈아주며 겨울엔 물그릇에 핫팩을 붙여두기도 하는 정도로 소소한 역할만 하고 있다. 내가 캣맘의 역할을 하는 곳은 은평구 **동의 작은 골목이다.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는 카페에서 동네 고양이들 밥과 물을 챙기고 있다. 새삼스레 헤아려보니 알고 지내는 캣대디도 가끔 있지만 근린공원을 찾아 밥을 주는 이들도, 나와 함 께 고양이 밥을 챙기는 나의 친구들도 전부 여성이다. 앗, 한 명은 ‘요정님’이라 불리는 세상 멋진 게이구나.
여성과 고양이 또는 동물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쉽게 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과 돌봄의 연결은 너무나도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오랜 시간 동안 돌봄 을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해왔다. 남성들의 사회활동은 자본으로 환산되는 경제활동이며 경력으로 인정되었으나 여성들 의 돌봄 노동은 가정이라는 틀 속에서 돈도 경력도 아닌 “네가 집에서 하는 게 뭐가 있다고!”라는 말을 감히 내뱉을 수 있을 만큼 비가시화(非可視化) 되어왔던 것이다. 억압(oppression)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부당하게 억누르거나 착 취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며 일견 남성과 여 성 간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을 돌봄의 주체로 위치 지었던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 의해서도 지탱되어 오고 있다. 이렇듯 억압과 피억압은 한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억압자와 피억압자 역시 단일하지 않다. 억압은 사회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과 교차하며 작동하므로 가부장제 역시 남성과 여성만 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또는 서열과 결합하여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매우 문제적이다.
다시 김현성 편집장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동물을 돌보고 챙기는 사람들은 어째서 대부분 여성인 걸까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러하다. “아마도,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 속에서 주로 피억압의 위치에 놓였던 경험이 많은 ‘여성’들이 가장 약자의 위치에 놓인 존재들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인간을 디폴 트로 설정한 세상에서 비인간 존재들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가방의 원단으로 소비되기 위해 양식되는 동물들, 먹히기 위해 삶을 강요받는 동물들, 좁아터진 우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채 도살장으로 향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들에게 인간은 억압자 그 이상 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인간과 비인간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는 민간인들의 희생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명명된 다.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일들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이런세상에서나는누구도부수적인존재가아닌세상을꿈꾼다.그세상은돌봄이특정한누군가의일이아니라함께 살아가는 모두의 일이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런 나를 혹자는 이상주의자라 부른다. 이상주의자를 무엇이라 생각하기 에 나를 그리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의 이상은 매우 구체적인 일상의 행위들에 닿아있 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이상주의자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 존 레넌도 말했다. “I’m not the only one”이라고. 어떤 존재도 홀로 살지 않는다. 서로에게 기대어 살기에 그나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북극곰의 안녕과 크릴새우의 존재가이곳에서의내삶에중요한것은바로그때문이다.그렇기에우리는질문해야한다.내삶은어떤존재에기대 어 살고 있는지, 내가 지워버린 돌봄은 누구의 것인지. 밤이 깊었고 사방이 고요한 시간,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고양이 들의 다정한 돌봄 속에서 잠들 것이다. / 문아영
문아영
피스모모 평화/교육 연구소 대표 피스모모는 수평적 서로배움을 통해 실천적 사유의 시민공동체를 확장함으로써 더 평화롭고 덜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비영리단체이다. 평화교육 및 관련 분야의 연구와 조사, 평화교육 진행자 양성 프로그 램 개발 및 제공, 평화교육자 네트워크 수립, 그리고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는 평화교육 플랫폼(platform) 구축의 일을 진행하고 있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03 ‘GIRLS & CAT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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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존재들의 연대
2018년 5월 15일, 나의 소중한 고양이 새촘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나와 새촘 이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새촘이는 의사들의 손에서 숨이 넘어가는 그 때에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엄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는 새촘이에게 ‘별일 아닐 거야, 새촘이 건강해질 거야’라 고 응답했다. 나는 정말 별일이 아닐 줄 알았다. 새촘이가 그렇게 영영 떠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다. 회복하는 중이었는데, 괜찮다고 했는데, 새촘이의 마지막은 의료사고였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 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것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세차게 저으면 그 생각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2월의 어느 목요일, 오보이의 김현성 편집장과 마주 앉았다. 소소하게 하고 있는 캣맘 역할과 반려 고양이와 살고 있는 덕분에 연결된 만남이었다. 김현성 편집장은 나에게 물었다. ‘고양이 밥, 왜 챙겨주세요?’ 준비한 적 없던 말이 입 밖으 로 툭 튀어나왔다. ‘걱정돼서요.’ 내가 한 말이지만 낯설었다. 아, 나 걱정되어서 밥 주고 있었던 거였구나. 말을 해 놓 고 서서히 깨달았다. 나는 고양이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김현성 편집장이 말했다. “제가 오보이를 10년쯤 해오고 있 잖아요. 근데 하면서 점점 더 궁금해지는 거예요. 왜 여성일까? 고양이를 챙겨주는 사람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 은 왜 대부분 여성일까. 동물을 돌보고 챙기는 사람들은 어째서 대부분 여성인 걸까요?” “아.. 그러게요. 정말 그렇네 요.” 나는 그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겨진 질문은 나의 몫이 되었다. 왜 대부분 여성일까? 왜 그런 걸까?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에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공원엔 멀리서 본 적만 있을 뿐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캣맘들이 있다. 부지런한 캣맘들은 아이들의 밥그릇이 비워질세라 사료를 두둑하게 채워주고 깨끗한 물도 수시로 갈아준다. 나는 가끔 그 자리에 사료를 보태고 물을 갈아주며 겨울엔 물그릇에 핫팩을 붙여두기도 하는 정도로 소소한 역할만 하고 있다. 내가 캣맘의 역할을 하는 곳은 은평구 **동의 작은 골목이다.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는 카페에서 동네 고양이들 밥과 물을 챙기고 있다. 새삼스레 헤아려보니 알고 지내는 캣대디도 가끔 있지만 근린공원을 찾아 밥을 주는 이들도, 나와 함 께 고양이 밥을 챙기는 나의 친구들도 전부 여성이다. 앗, 한 명은 ‘요정님’이라 불리는 세상 멋진 게이구나.
여성과 고양이 또는 동물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쉽게 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과 돌봄의 연결은 너무나도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오랜 시간 동안 돌봄 을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해왔다. 남성들의 사회활동은 자본으로 환산되는 경제활동이며 경력으로 인정되었으나 여성들 의 돌봄 노동은 가정이라는 틀 속에서 돈도 경력도 아닌 “네가 집에서 하는 게 뭐가 있다고!”라는 말을 감히 내뱉을 수 있을 만큼 비가시화(非可視化) 되어왔던 것이다. 억압(oppression)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부당하게 억누르거나 착 취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며 일견 남성과 여 성 간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을 돌봄의 주체로 위치 지었던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 의해서도 지탱되어 오고 있다. 이렇듯 억압과 피억압은 한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억압자와 피억압자 역시 단일하지 않다. 억압은 사회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과 교차하며 작동하므로 가부장제 역시 남성과 여성만 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또는 서열과 결합하여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매우 문제적이다.
다시 김현성 편집장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동물을 돌보고 챙기는 사람들은 어째서 대부분 여성인 걸까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러하다. “아마도,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 속에서 주로 피억압의 위치에 놓였던 경험이 많은 ‘여성’들이 가장 약자의 위치에 놓인 존재들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인간을 디폴 트로 설정한 세상에서 비인간 존재들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가방의 원단으로 소비되기 위해 양식되는 동물들, 먹히기 위해 삶을 강요받는 동물들, 좁아터진 우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채 도살장으로 향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들에게 인간은 억압자 그 이상 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인간과 비인간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는 민간인들의 희생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명명된 다.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부수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일들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이런세상에서나는누구도부수적인존재가아닌세상을꿈꾼다.그세상은돌봄이특정한누군가의일이아니라함께 살아가는 모두의 일이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런 나를 혹자는 이상주의자라 부른다. 이상주의자를 무엇이라 생각하기 에 나를 그리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의 이상은 매우 구체적인 일상의 행위들에 닿아있 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이상주의자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 존 레넌도 말했다. “I’m not the only one”이라고. 어떤 존재도 홀로 살지 않는다. 서로에게 기대어 살기에 그나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북극곰의 안녕과 크릴새우의 존재가이곳에서의내삶에중요한것은바로그때문이다.그렇기에우리는질문해야한다.내삶은어떤존재에기대 어 살고 있는지, 내가 지워버린 돌봄은 누구의 것인지. 밤이 깊었고 사방이 고요한 시간,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고양이 들의 다정한 돌봄 속에서 잠들 것이다. / 문아영
문아영
피스모모 평화/교육 연구소 대표 피스모모는 수평적 서로배움을 통해 실천적 사유의 시민공동체를 확장함으로써 더 평화롭고 덜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비영리단체이다. 평화교육 및 관련 분야의 연구와 조사, 평화교육 진행자 양성 프로그 램 개발 및 제공, 평화교육자 네트워크 수립, 그리고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는 평화교육 플랫폼(platform) 구축의 일을 진행하고 있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03 ‘GIRLS & CAT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hBoy! No.103 MAR AP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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