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하고 행복한 망상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한다. ‘우리 00 이는 행복할까?’ ‘ᄆᄆ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해.’ ‘내가 ᄋᄋ 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할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 공통된 궁금증을 해결하고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반려동물이 행복한지, 아픈 곳은 없는지, 또 아프다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자 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언어가 다른 종끼리의 소통에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물들이 말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사람의 언어를 알지 못하고 우리도 동물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꼬리를 흔들고 배를 뒤집어 하늘로 향하고 혀를 내밀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기분과 상태를 표현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만족할 수 없다. 배가 아프면 배의 어디가 아픈지, 옆구리인지 명 치인지, 더부룩한 건지, 쑤시는 건지, 얼마나 자주 그런 건지.. 사랑하는 나의 분신이 사람의 언어로 나에게 모든 걸 얘기해 주기를 원한다. 반려동물이 사람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들의 언어를 배워서라도 그 마음을 알고 싶다. 멍 멍! 끙끙.. 야옹~ 그르르.. 하지만 결국 우리는 완벽한 소통에 다다르지 못한다. 1968년 영화 <혹성 탈출>에서 찰톤 헤스톤이 불시착한 행성에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유인원을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은 꽤나 불쾌한 것이었겠지만 그런 상 황이 차라리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실 역시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동물과 마음으로 얘기하고 그 얘기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의 말을 100% 신뢰하고 싶지만 그건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위안이며 또 다른 주제의 얘기일 것이다.
수십 년간 많은 수의 반려동물과 함께 하고 또 그 아이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함께 하면서 항상 안타까웠던 건 자 식 같은 동물들이 늙고 병들어 병원 왕래가 잦아지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 아이들이 직접 자신의 증상과 아픈 곳을 직접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려동물, 특히 고양이는 자신이 아픈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이 강하다. 너무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기준으로 동물의 상태를 단정 짓고 예측한다. 물론 의료기 술이 많이 발전했고 시스템도 꽤 믿을만한 수준에 올라있지만 자식 같은 반려동물이 아프면 사람들의 마음은 더 복잡하고 심란해질 수밖에 없다. 병원 출입 자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반려동물이라면 주인들의 심정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동물들은 사람과 비슷하게 일상에서 일정한 습관이나 루틴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다. 잠은 주인의 다리 사이에서 자며 자고 있는 주인에게 아침 달라고 얼굴을 핥는다든지, 작업할 때는 컴퓨터 앞에서 낮잠을 자고 화장실을 치우기 위해 샤워 기를 틀면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온다든지 말이다. 그런 일상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면 보통 몸 어딘가에 이상이 있을까 능성이 크다. 그럼 주인은 바짝 긴장하게 되고 어떤 이상 행동을 보이는지, 어떤 이상 증상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한다. 무사히 별일 없이 지나갈 때도 있고, 증상이 보여 병원으로 달려갈 때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반려동물이 “나 괜찮아. 속이 좀 안 좋았는데 똥 눴더니 이제 괜찮아.”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망상에 빠지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부질없는 희망과 헛된 망상에 빠져든다.
사랑하는 존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알고 싶은 마음은 종을 초월하지만 동일한 언어 체계를 가진 인간끼리도 통하지 못하면서 동물과 완벽한 소통을 하고 싶다는 건 무모한 욕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을 것이다. 작업하고 있는 책상 위로 뛰어 올라와 뻔뻔한 엉덩이를 들이밀면 궁디팡팡 해달라는 신호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TV를 보고 있는 잎으로 달려와서 애처로운 표정과 함께 앞발로 무릎을 긁어대면 ‘이제 저녁시간이야’라고 말하는 거라는 것 정도도 쉬운 사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오늘은 거기 말고 왼쪽 엉덩이를 조금 더 많이 두드려 줘.” “오늘 사료가 좀 별로네, 내일은 북어를 좀 끓여서 섞어줘 봐.” “어제 놀러 왔던 옆집 바둑이는 언제 또 온대?”까지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계의 유능한 과학자들과 기업들은 오늘도 열심히 초코와 또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려줄 완벽한 통역기를 발명하기 위해 연구해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정말로 그 ‘완벽한 통역기’를 발명하는 과학자에게 사람들은 더없이 열광하고 그 어떤 보상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 발명품이 정말로 나와서 주문한 통역기가 택배로 도착할 미래를 꿈꾸며 여러분들의 반려동물이 써준 편지와 일 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쿨쿨 자고 있는 초코와 또치의 말투를 상상하고 기분을 예측해서 끙끙대며 글을 써서 보냈을 주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겠지만 그들의 마음과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다. 사실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마치 희망고문과도 같은 특집을 기획한 오 보이! 편집부의 마음도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12 ‘A LETTER FROM YOUR DO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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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하고 행복한 망상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한다. ‘우리 00 이는 행복할까?’ ‘ᄆᄆ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해.’ ‘내가 ᄋᄋ 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할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 공통된 궁금증을 해결하고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반려동물이 행복한지, 아픈 곳은 없는지, 또 아프다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자 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언어가 다른 종끼리의 소통에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물들이 말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사람의 언어를 알지 못하고 우리도 동물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꼬리를 흔들고 배를 뒤집어 하늘로 향하고 혀를 내밀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기분과 상태를 표현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만족할 수 없다. 배가 아프면 배의 어디가 아픈지, 옆구리인지 명 치인지, 더부룩한 건지, 쑤시는 건지, 얼마나 자주 그런 건지.. 사랑하는 나의 분신이 사람의 언어로 나에게 모든 걸 얘기해 주기를 원한다. 반려동물이 사람의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들의 언어를 배워서라도 그 마음을 알고 싶다. 멍 멍! 끙끙.. 야옹~ 그르르.. 하지만 결국 우리는 완벽한 소통에 다다르지 못한다. 1968년 영화 <혹성 탈출>에서 찰톤 헤스톤이 불시착한 행성에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유인원을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은 꽤나 불쾌한 것이었겠지만 그런 상 황이 차라리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실 역시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동물과 마음으로 얘기하고 그 얘기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의 말을 100% 신뢰하고 싶지만 그건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위안이며 또 다른 주제의 얘기일 것이다.
수십 년간 많은 수의 반려동물과 함께 하고 또 그 아이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함께 하면서 항상 안타까웠던 건 자 식 같은 동물들이 늙고 병들어 병원 왕래가 잦아지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 아이들이 직접 자신의 증상과 아픈 곳을 직접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려동물, 특히 고양이는 자신이 아픈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이 강하다. 너무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기준으로 동물의 상태를 단정 짓고 예측한다. 물론 의료기 술이 많이 발전했고 시스템도 꽤 믿을만한 수준에 올라있지만 자식 같은 반려동물이 아프면 사람들의 마음은 더 복잡하고 심란해질 수밖에 없다. 병원 출입 자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반려동물이라면 주인들의 심정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동물들은 사람과 비슷하게 일상에서 일정한 습관이나 루틴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다. 잠은 주인의 다리 사이에서 자며 자고 있는 주인에게 아침 달라고 얼굴을 핥는다든지, 작업할 때는 컴퓨터 앞에서 낮잠을 자고 화장실을 치우기 위해 샤워 기를 틀면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온다든지 말이다. 그런 일상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면 보통 몸 어딘가에 이상이 있을까 능성이 크다. 그럼 주인은 바짝 긴장하게 되고 어떤 이상 행동을 보이는지, 어떤 이상 증상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한다. 무사히 별일 없이 지나갈 때도 있고, 증상이 보여 병원으로 달려갈 때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반려동물이 “나 괜찮아. 속이 좀 안 좋았는데 똥 눴더니 이제 괜찮아.”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망상에 빠지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부질없는 희망과 헛된 망상에 빠져든다.
사랑하는 존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알고 싶은 마음은 종을 초월하지만 동일한 언어 체계를 가진 인간끼리도 통하지 못하면서 동물과 완벽한 소통을 하고 싶다는 건 무모한 욕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을 것이다. 작업하고 있는 책상 위로 뛰어 올라와 뻔뻔한 엉덩이를 들이밀면 궁디팡팡 해달라는 신호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TV를 보고 있는 잎으로 달려와서 애처로운 표정과 함께 앞발로 무릎을 긁어대면 ‘이제 저녁시간이야’라고 말하는 거라는 것 정도도 쉬운 사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오늘은 거기 말고 왼쪽 엉덩이를 조금 더 많이 두드려 줘.” “오늘 사료가 좀 별로네, 내일은 북어를 좀 끓여서 섞어줘 봐.” “어제 놀러 왔던 옆집 바둑이는 언제 또 온대?”까지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계의 유능한 과학자들과 기업들은 오늘도 열심히 초코와 또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려줄 완벽한 통역기를 발명하기 위해 연구해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정말로 그 ‘완벽한 통역기’를 발명하는 과학자에게 사람들은 더없이 열광하고 그 어떤 보상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 발명품이 정말로 나와서 주문한 통역기가 택배로 도착할 미래를 꿈꾸며 여러분들의 반려동물이 써준 편지와 일 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쿨쿨 자고 있는 초코와 또치의 말투를 상상하고 기분을 예측해서 끙끙대며 글을 써서 보냈을 주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겠지만 그들의 마음과 태도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다. 사실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마치 희망고문과도 같은 특집을 기획한 오 보이! 편집부의 마음도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12 ‘A LETTER FROM YOUR DO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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