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식의 조건
‘좋은 음식’이란 피상적이고 주관적이며 가치 교란적인 표현이다. 어머니들 은 자식의 배를 불리고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을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미식가들은 끊임없이 미뢰의 쾌락을 찾아 여정을 떠난다. 헬스트레이너 A 는 자신이 섭취하고 마시는 영양소와 물 한 방울까지도 근육과 에너지로 온전히 치환되는 음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스타 쉐프 B는 지난주에 들여 온 최상급 와규로 구워 낼 스테이크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 있다. 좋은 재료를 정성을 다해 다듬고 적당한 간을 더해 몸에도 좋은 음식을 만들어도 음식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따지는 사람, 세 살 때부터 탄산음료와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맛없고 지루한 음식일 수밖에 없다. 모든 가치와 평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먹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완벽에 가까운 좋은 음식을 정의하기 위해 평생을 연구한다고 해도 그 답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죽인다. 음식이 되기 위해 죽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불행한 삶을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은 음식의 최우선 조건으로 여길 몸에 좋고 건강한 음식의 생산과정에 포함된 착취와 학대, 파괴와 방관의 과정은 역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어한다. 파괴와 방관의 희생자는 동물, 혹은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있는 이별이다. 우리는 보통 몸에 좋다고 여겨지거나 혀와 뇌가 흥분 된다면 그음식이 나의 밥상에 올라오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 착취와 폭력, 그 어떤 부당함도 따지지 않거나 일부러 외면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것으로 인해 건강해 지기를 원하며 최소한 먹은 음식때문에 몸이 상하지는 않기를 바랄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음식은 내몸에도 좋으면서 생명을 해치지 않고 환경을 망치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음식 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이상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이지 않고 얼마든지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살 수 있지만 나의 입맛을 통제하는 달콤하고 기름진 동물성 단백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짧은 글 하나로 육식인과 채식인 사이에 또 한 번 의국지전이 발발했다. 글의 내용은 채식을 하는 새언니 몰래 조카에게 고기를 먹였다가 오빠는 이혼 위기에, 자신은 피고소 위기에 처했다는 호소였다. 글쓴이는 오빠야 밖에서 몰래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조카는 그럴 수 없어 마르고 또래에 비해 힘도 없는게 안타깝다는 요지로 글을 올렸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채식 새언니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아이에게 채식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자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유다. 또 외국의 한 조사에서는 남성 4분의3 이상이 채식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였다. 그들은 고기를 끊느니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유발하는 다양한 암과 심장병, 수명 단축의 위험을 감수 하겠다고 말했다. 남성은 어리석고 무심한 존재라고 단순하게 치부하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육식인들의 분노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린 아이가 자신의 선택이 아닌 어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건강하게 크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고 이기적인 어른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그들의 분노가 그 어린 꼬마를 위한 것이든 요즘 들어 부쩍 고기를 먹는 자신을 마치 죄인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위선적인 채식인들을 향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 이 분노는 실체가 있으며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Scene#1격무에 시달리는 광고 회사 팀장 A는 팀의 명운이 달린 이번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팀원들과 회식을 가졌다.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큰 마음 먹고 등심과 갈비를 쐈고 팀원들은 믿음직한 팀장에 게 감사하며 소고기 회식을 즐겼다.
Scene#2 하루 종일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공중파 방송의 생생정보 프로그램들. 한돈 협회에서 주최하는 돼지고기 케잌 만들기 경연대회가 소개된다. 바로이어 손님들 입맛 사로잡는 등갈비 식당을 익살 맞은 성우가 입맛을 자극하는 멘트로 시청자들의 저녁 메뉴를 결장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식당 손님들은 홍보대사를 자처하며 현란하게 다가서는 방송국 카메라에 엄지를 척 세우며 맛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강조한다. 식당 사장님은 비법 소스라며 레시피를 공개한다. 이어 등장한 식품영양학 박사는 돼지고기가 알마나 몸에 좋고 이로운지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며 소비를 권한다.
Scene#3 유명 쉐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한 영화, 슬럼프를 이기기 위해 아들과 푸드트럭을 타고 미 전역을 여행하며 사람들과 만나고 인간미 넘치는 에피소드를 겪으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그가 만드는 음식으로 많은 사람 들 역시 치유된다. 등장 하는 다양한 고기 요리의 맛은 환상적이다.
음식에 탐닉하는 모습은 종종 쉽게 미화되고, 무해 하며 친근한 모습으로 포장된다. 여러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밥상에 올리는 인간의 행동양식은 따로 정당성을 부여 받을 필요 조차 없는 자연스럽고 떳떳한 행위로 인식되어왔다. 이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행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판받는 지점에서 갈등은 증폭된다. 인류가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해왔던 행동이 어느날 갑자기 불편 부당한 행위로 취급받는다는 건 상당히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다. 식당에 갔는데 일행중 하나가 자신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순간,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나는 고고한 채식주의자 앞에서 야만스럽고 본능에 굴복하는 쾌락주의자로 전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이면에 존재하는 동물권 문제와 공장식 축산의 폐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들춰내어 자신이 평생 즐겨 왔던 행위가 죄책감으로 작용하는 순간의 반감과 거부반응은 조롱과 공격성으로 변해 채식인들을 향한다.
한국 사회에서 먹는 행위가 비판의 대상이 될수도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속이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재산을 뻿지 않는 이상, 공공 에티켓만 잘지켜도 남에게 비판 받을 일은 없을것으로 믿고 살아왔다. 내가 먹는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우리에게 동물은 그저 음식이었다. 거꾸로 우리가 매일 먹어 왔던 음식이 살아 숨쉬던 동물이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인구달 이라는 여성이 얘기하는 희망의 밥상을 읽을때만 해도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식문화가 훌륭하다고 해서 무수하게 희생된 동물들의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동물의 고통과 하나의 생명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의 권리는 음식문 화의 가치와 전통의 고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의 음식에는 분명 무심한 착취와 잔혹한 죽음이 존재하며 그 수많은 생명들의 고통은 어떤것으로도 보상받거나 위로받을 수 없다. 사람이 동물을 먹는 행위는 해가 뜨고 지는것처럼 자연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을 방관하고 외면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좋은 음식의 정의는 다양하게 내릴 수 있지만 이제 인류는 조금 더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고 전향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아주 단순한 문제이지만 해결은 어렵다.
공상 소설에서 묘사되던 캡슐로 끼니를 해결하는 시대가 오지 않는 이상 먹을 것, 특히 육식을 향한 욕망은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고기를 먹고자 할것이며 또 대부분은 육식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과 성찰이 부재한 사회에서 살다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며 죽어갈 것이다. 생명을 죽이는 건 나의 식탁이 풍부해지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이다. 굳이 도축장의 벽을 유리로 만들어서 최고의 즐거움을 찜찜해하며 즐길 하등의 이유는 없다. 모두에게 좋은 음식이란건 마치 신화속의 유니콘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위해 죽어야하는 동물들은 이 별에서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먹히기 위해 갇히고 고통받고 죽지 않아도 모두가 먹는것에 만족하는 ‘좋은음식’의 세상이 올 수 있을까?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10 ‘GOOD FOOD’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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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의 조건
‘좋은 음식’이란 피상적이고 주관적이며 가치 교란적인 표현이다. 어머니들 은 자식의 배를 불리고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을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미식가들은 끊임없이 미뢰의 쾌락을 찾아 여정을 떠난다. 헬스트레이너 A 는 자신이 섭취하고 마시는 영양소와 물 한 방울까지도 근육과 에너지로 온전히 치환되는 음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스타 쉐프 B는 지난주에 들여 온 최상급 와규로 구워 낼 스테이크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 있다. 좋은 재료를 정성을 다해 다듬고 적당한 간을 더해 몸에도 좋은 음식을 만들어도 음식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따지는 사람, 세 살 때부터 탄산음료와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맛없고 지루한 음식일 수밖에 없다. 모든 가치와 평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먹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완벽에 가까운 좋은 음식을 정의하기 위해 평생을 연구한다고 해도 그 답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죽인다. 음식이 되기 위해 죽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불행한 삶을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은 음식의 최우선 조건으로 여길 몸에 좋고 건강한 음식의 생산과정에 포함된 착취와 학대, 파괴와 방관의 과정은 역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어한다. 파괴와 방관의 희생자는 동물, 혹은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있는 이별이다. 우리는 보통 몸에 좋다고 여겨지거나 혀와 뇌가 흥분 된다면 그음식이 나의 밥상에 올라오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 착취와 폭력, 그 어떤 부당함도 따지지 않거나 일부러 외면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것으로 인해 건강해 지기를 원하며 최소한 먹은 음식때문에 몸이 상하지는 않기를 바랄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음식은 내몸에도 좋으면서 생명을 해치지 않고 환경을 망치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음식 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이상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이지 않고 얼마든지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살 수 있지만 나의 입맛을 통제하는 달콤하고 기름진 동물성 단백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짧은 글 하나로 육식인과 채식인 사이에 또 한 번 의국지전이 발발했다. 글의 내용은 채식을 하는 새언니 몰래 조카에게 고기를 먹였다가 오빠는 이혼 위기에, 자신은 피고소 위기에 처했다는 호소였다. 글쓴이는 오빠야 밖에서 몰래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조카는 그럴 수 없어 마르고 또래에 비해 힘도 없는게 안타깝다는 요지로 글을 올렸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채식 새언니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아이에게 채식을 강요하는 건 폭력이자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이유다. 또 외국의 한 조사에서는 남성 4분의3 이상이 채식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였다. 그들은 고기를 끊느니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유발하는 다양한 암과 심장병, 수명 단축의 위험을 감수 하겠다고 말했다. 남성은 어리석고 무심한 존재라고 단순하게 치부하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육식인들의 분노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린 아이가 자신의 선택이 아닌 어른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건강하게 크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고 이기적인 어른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그들의 분노가 그 어린 꼬마를 위한 것이든 요즘 들어 부쩍 고기를 먹는 자신을 마치 죄인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위선적인 채식인들을 향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 이 분노는 실체가 있으며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Scene#1격무에 시달리는 광고 회사 팀장 A는 팀의 명운이 달린 이번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팀원들과 회식을 가졌다.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큰 마음 먹고 등심과 갈비를 쐈고 팀원들은 믿음직한 팀장에 게 감사하며 소고기 회식을 즐겼다.
Scene#2 하루 종일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공중파 방송의 생생정보 프로그램들. 한돈 협회에서 주최하는 돼지고기 케잌 만들기 경연대회가 소개된다. 바로이어 손님들 입맛 사로잡는 등갈비 식당을 익살 맞은 성우가 입맛을 자극하는 멘트로 시청자들의 저녁 메뉴를 결장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식당 손님들은 홍보대사를 자처하며 현란하게 다가서는 방송국 카메라에 엄지를 척 세우며 맛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강조한다. 식당 사장님은 비법 소스라며 레시피를 공개한다. 이어 등장한 식품영양학 박사는 돼지고기가 알마나 몸에 좋고 이로운지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며 소비를 권한다.
Scene#3 유명 쉐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한 영화, 슬럼프를 이기기 위해 아들과 푸드트럭을 타고 미 전역을 여행하며 사람들과 만나고 인간미 넘치는 에피소드를 겪으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그가 만드는 음식으로 많은 사람 들 역시 치유된다. 등장 하는 다양한 고기 요리의 맛은 환상적이다.
음식에 탐닉하는 모습은 종종 쉽게 미화되고, 무해 하며 친근한 모습으로 포장된다. 여러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밥상에 올리는 인간의 행동양식은 따로 정당성을 부여 받을 필요 조차 없는 자연스럽고 떳떳한 행위로 인식되어왔다. 이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행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비판받는 지점에서 갈등은 증폭된다. 인류가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해왔던 행동이 어느날 갑자기 불편 부당한 행위로 취급받는다는 건 상당히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다. 식당에 갔는데 일행중 하나가 자신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순간, 분위기는 어색해지고 나는 고고한 채식주의자 앞에서 야만스럽고 본능에 굴복하는 쾌락주의자로 전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이면에 존재하는 동물권 문제와 공장식 축산의 폐해, 지구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들춰내어 자신이 평생 즐겨 왔던 행위가 죄책감으로 작용하는 순간의 반감과 거부반응은 조롱과 공격성으로 변해 채식인들을 향한다.
한국 사회에서 먹는 행위가 비판의 대상이 될수도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속이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재산을 뻿지 않는 이상, 공공 에티켓만 잘지켜도 남에게 비판 받을 일은 없을것으로 믿고 살아왔다. 내가 먹는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우리에게 동물은 그저 음식이었다. 거꾸로 우리가 매일 먹어 왔던 음식이 살아 숨쉬던 동물이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인구달 이라는 여성이 얘기하는 희망의 밥상을 읽을때만 해도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식문화가 훌륭하다고 해서 무수하게 희생된 동물들의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동물의 고통과 하나의 생명으로서 누려야 할 행복의 권리는 음식문 화의 가치와 전통의 고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의 음식에는 분명 무심한 착취와 잔혹한 죽음이 존재하며 그 수많은 생명들의 고통은 어떤것으로도 보상받거나 위로받을 수 없다. 사람이 동물을 먹는 행위는 해가 뜨고 지는것처럼 자연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을 방관하고 외면하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좋은 음식의 정의는 다양하게 내릴 수 있지만 이제 인류는 조금 더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고 전향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아주 단순한 문제이지만 해결은 어렵다.
공상 소설에서 묘사되던 캡슐로 끼니를 해결하는 시대가 오지 않는 이상 먹을 것, 특히 육식을 향한 욕망은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고기를 먹고자 할것이며 또 대부분은 육식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과 성찰이 부재한 사회에서 살다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며 죽어갈 것이다. 생명을 죽이는 건 나의 식탁이 풍부해지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이다. 굳이 도축장의 벽을 유리로 만들어서 최고의 즐거움을 찜찜해하며 즐길 하등의 이유는 없다. 모두에게 좋은 음식이란건 마치 신화속의 유니콘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위해 죽어야하는 동물들은 이 별에서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먹히기 위해 갇히고 고통받고 죽지 않아도 모두가 먹는것에 만족하는 ‘좋은음식’의 세상이 올 수 있을까?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10 ‘GOOD FOOD’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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