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현성
어떤 밴드 좋아하세요?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저만 아는 가수거든요. 국민 가수가 된 혁오를 자기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장도연은 혁오 밴드가 TV에 등장하자 쇼크로 쓰러진다. 몇 년 전 홍대병을 주제로 한 콩트를 킥킥 웃으며 보면서도 가슴 한켠이 살짝 뜨끔했던 사실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물론 알고 있는 이조차 얼마 없던 브랜드가 갑자기 왁자지껄 유행하며 소위 멋 좀 안다는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괜히 심술이 난다. 그런 브랜드 중의 하나가 USM이다. 1960년대 초반 사무용 가 구로 출발한 USM은 뛰어난 디자인과 무한한 확장성으로 사무 공간은 물론이고 거실과 침실, 그밖의 다양한 공간을 점령한 모듈 가구이다. 1990년대 초, 지금의 취향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친한 형을 통해 알게 된 이 스위스산 가구를 알거나 소유했던 이들은 드물었지만 21세기 들어 갑자기 유행하면서 한국의 멋쟁이들과 신혼 커플들의 쇼핑 리스트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임스(Eames) 부부나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르코르 뷔제(Le Corbusier)나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 등의 거장들이 디자인 하고 비트라 (Vitra)나 카시나(Cassina), 놀(Knoll) 등의 가구 브랜드에서 제작하는 의자와 소파, 장 식장과 조명 등이 젊은층의 관심을 끌면서 언제부턴가 한국은 갑자기 바우하우스풍 기능주의 가구들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USM은 훌륭한 브랜드다. 스위스의 디자인 철학과 기능적인 확장성은 어떤 공간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임스의 매력을 거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웬만한 수준의 인테리어 로 꾸며진 실내에 임스의 의자를 놓는 순간 화룡점정처럼 마침내 공간은 완성 된다. 비초에(Vitsoe)의 모듈 선반은 공간을 가리지 않고 기능적이며 미니멀한 수납 공간을 제공해 준다. 아르테미데(Artemide)의 조명은 3차원의 공간에 입체적인 빛을 더해주는 조명인 동시에 기구 자체가 예술품처럼 공간을 더욱더 멋지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인테리어나 공 간 자체의 매력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렐 수밖에 없고 이 짧은 지면에 그 무한한 매력을 소개하기에는 불가능한 수많은 가구와 조명, 하이파이 오디오 기기들이 춘추전국시대처럼 범람하며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특정 카테고리 내의 브랜드와 제품들이 국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조금은 낯선 풍경을 한 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 그밖의 일본이나 기타 국가들의 전형적인 유통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백화점에서 본 바로 그 가구’, ‘백화점과 똑같은 정품!’, 혹은 ‘연예인 아무개가 가지고 있는 제품’ 등의 경박한 온라인 광고 카피와 수많은 유튜버들의 깊이 없는 리뷰, 마치 매 시즌 유행이 급변하는 의류 시장의 신상 아이템처럼 왁자지껄 하게 유행, 유통되고 회자되는 모습은 조금 당황스럽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백화점 가구 코너에는 지금처럼 USM과 여타의 지금 유행하는 가구들은 눈에 띄지 않았었다. 최소 5,60년 이상의 전통이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예전부터 꾸준히 유통되어 왔던 물건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유행이 되고 갑자기 여기저기서 보인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어떤 제품이 유행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유통시장은 분명 상당히 다른 게 사실이다.
이렇게 특정 브랜드들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그 고유의 매력과 높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언급한 가구들이 어떤 공식처럼 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광경을 보면 그 공간의 소유자의 취향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루이 폴센의 조명과 프리츠한센의 테이블까지 있다면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한다. 브라운의 오디오(산업 디자인적 측면에서 좋아한다면 모르지만 좋은 소리를 위해서 브라운을 사는 하이파이 매니아는 없다)나 빈티지 뱅앤올룹슨, 혹은 JBL의 스튜디오 모니터나 탄노이의 동축 유닛 스피커까지 있다면 그건 용의자가 진범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비초에 선반에 매거진B나 월페이퍼 등의 잡지가 가로로 정갈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보통 남과 다른 것을 가짐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괴이하게도 한국 소비자들은 남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압도적으로 더 커 보인다. 마치 모두가 보는 영화를 우르르 몰려가서 다같이 보는 천만 영화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달리 많은 것처럼.
공간은 그 공간을 소유한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공간에 투자를 하는건 의미 있는 행위이다. 좋은 공간에서 산다는 건 상당히 가치 있는 일이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그 공간에서 느끼고 싶은 안식은 모두 그 공간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떤 가구를 어떻게 배치하는가로 상당 부분 결정되기 때문이다. 좋은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의 욕망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취향 없는 소비와 과시의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그 공간은 생명력을 잃고 무의미한 몰취향의 모델하우스가 되고 만다. 근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바로크식 소파와 등나무 가구, 거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마치 같은 공간에서 충돌하고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알록달록 서랍장과 싸구려 샹들리에가 거실을 지배하던 혼돈의 시대는 이제 거의 갔지만(사실 아직도 그런 부모님 댁이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인테리어 잡지의 전형적인 한 페이지처럼 USM과 임스, 비초에로 가득 들어찬 공간이 더 매력적이라고 얘기 하기에도 뭔가 찜찜한 뒷맛이 분명 존재한다.
철물점에서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평범한 문손잡이보다는 논현동 가구거리의 철물 전문점에서 고른 이태리제 호페(Hoppe)가 멋지다는 걸 알게 되고 다음으로 그보다 조금 더 비싼 독일제 하펠레(Hafele) 손잡이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아직 정식 수입도 안된 덴마크의 디라인(D-line)을 알아버리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집안의 손잡이 몇개, 화장실 휴지걸이, 수건걸이, 선반 몇개만 달아도 기백만원의 지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디라인도 동일 제품군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는 아니다. 사람의 눈과 취향은 점점 더 비싸고 고급의 물건에 적응하고 만족을 느끼기 마련이다. 르코르뷔제의 그랜드콤포트 LC3 소파를 사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국내 업체의 무난한 가격, 무난한 디자인의 3인용 라텍스 소파에 눈길을 줄리 만무한 것처럼 눈과 취향, 그리고 소비의 규모는 하향 유턴하기 힘든 것이다.
소위 젊은 세대들이 인테리어와 가구, 하이파이 오디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수입가구의 경우 강남 논현동 가구거리와 청담동 수입가구 거리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부유한 소수의 소비층들을 타겟으로 한 시장만이 존재했을 뿐이었고 하이파이 오디오의 경우 충무로와 청계전, 용산전자상가를 무대로 하는 수입 오디오 업계가 중장년층의 남성 오디오 매니아들을 공략하는 지극히 작은 시장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21세기에 들어오고 온라인 마켓이 활성화 되면서 대중과 젊은층에는 낯설게 느껴지던 유럽의 비트라나 카시나, 혹은 미국의 허먼 밀러나 놀 등의 가구 제조, 유통 회사등의 제품들이 알려지면서 2,30대에게 임스나 프리츠한센, 카르텔과 르코르뷔제 같은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히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구들의 인기가 온라인 유통사의 마케팅으로 힘을 얻으면서 국내의 인테리어나 건축 잡지를 장식하던 제품군도 예전과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업이 판매하는(공급) 제품을 소비자는 구매한다(수요). 수입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제품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장에 USM과 임스, 비초에가 유통되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USM과 임스, 비초에를 살 수밖에 없다. 물론 조금 더 적극적이고 개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는 해외 직구나 중고 제품을 찾아 자신은 어딘가 다르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애쓰겠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공급되는 제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할 뿐이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비자의 수동성과 몰취향을 비판하기에 앞서 어떤 브랜드나 특정 제품이 너무 과다하게 지속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목격된다면 그 피로함이 혐오감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좋은 취향에 멋진 직업을 가졌다고 하는 이들의 공간을 소개하는 잡지 기사나 영상에 등장하는 원색의 판넬과 스틸 프레임을 뽐내며 서있는 USM 가구를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많이 목격했다. 모든 집이며 사무실들이 USM 쇼룸같아 보이는 이 생경한 장면들은 마치 수 년 전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모두 시커먼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다니던 풍경을 연상시킨다. 당시 미국 노스페이스의 회장은 한국에 산이 많아서 모두들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닌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농담처럼 돌기도 했었다. 스위스, 독일, 기능주의, USM, 바우하우스,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제, 놀, 임스, 비트라와 허먼밀러의 골수팬으로서 능력과 돈만 있다면 그들처럼 USM으로 거실을 꽉 채우고 살고 싶지만 아마도 내 평생 그 어떤 USM 제품도 나의 공간에 들어올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잡지에서, 영상에서 그들의 USM을 볼때마다 그 확신은 점점 더 강해진다.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럴 필요 없는 물건들조차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고 있다. 나는 홍대병에 걸린 장도연처럼 중증 환자는 아니지만 나에게 USM은 아마 철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멋진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면 가장 먼저 당신의 USM을 처분하길 바란다. 그곳은 당신 고유의 공간이 아니라 USM이 있는 또 하나의 쇼룸이자 모델하우스일 뿐이다. 적어도 백화점, 가구 멀티샵,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서 경쟁하듯 유통되고 있는 이 브랜드의 당황스러운 유행이 지속되는 한 말이다. 최근에 타계한 영국의 거장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윔블던 하우스의 실내에는 노란색 USM 장식장과 임스의 체어, 비초에의 벽선반 등이 그야말로 적절하고 근사하게 공간을 완성하고 있다. 평소 생각하는 완벽한 주택 디자인에 가장 근접한 공간이다. 그렇게 완벽한 공간에 완벽한 조합의 가구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겁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USM의 가구를 선물로 준다면 어떨까? 아, 나는 아마도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처럼 지독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음, 네.. 솔직히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14 ‘MY FAVORITE THING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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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성
어떤 밴드 좋아하세요?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저만 아는 가수거든요. 국민 가수가 된 혁오를 자기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장도연은 혁오 밴드가 TV에 등장하자 쇼크로 쓰러진다. 몇 년 전 홍대병을 주제로 한 콩트를 킥킥 웃으며 보면서도 가슴 한켠이 살짝 뜨끔했던 사실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물론 알고 있는 이조차 얼마 없던 브랜드가 갑자기 왁자지껄 유행하며 소위 멋 좀 안다는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괜히 심술이 난다. 그런 브랜드 중의 하나가 USM이다. 1960년대 초반 사무용 가 구로 출발한 USM은 뛰어난 디자인과 무한한 확장성으로 사무 공간은 물론이고 거실과 침실, 그밖의 다양한 공간을 점령한 모듈 가구이다. 1990년대 초, 지금의 취향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친한 형을 통해 알게 된 이 스위스산 가구를 알거나 소유했던 이들은 드물었지만 21세기 들어 갑자기 유행하면서 한국의 멋쟁이들과 신혼 커플들의 쇼핑 리스트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임스(Eames) 부부나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르코르 뷔제(Le Corbusier)나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 등의 거장들이 디자인 하고 비트라 (Vitra)나 카시나(Cassina), 놀(Knoll) 등의 가구 브랜드에서 제작하는 의자와 소파, 장 식장과 조명 등이 젊은층의 관심을 끌면서 언제부턴가 한국은 갑자기 바우하우스풍 기능주의 가구들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USM은 훌륭한 브랜드다. 스위스의 디자인 철학과 기능적인 확장성은 어떤 공간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임스의 매력을 거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웬만한 수준의 인테리어 로 꾸며진 실내에 임스의 의자를 놓는 순간 화룡점정처럼 마침내 공간은 완성 된다. 비초에(Vitsoe)의 모듈 선반은 공간을 가리지 않고 기능적이며 미니멀한 수납 공간을 제공해 준다. 아르테미데(Artemide)의 조명은 3차원의 공간에 입체적인 빛을 더해주는 조명인 동시에 기구 자체가 예술품처럼 공간을 더욱더 멋지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인테리어나 공 간 자체의 매력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렐 수밖에 없고 이 짧은 지면에 그 무한한 매력을 소개하기에는 불가능한 수많은 가구와 조명, 하이파이 오디오 기기들이 춘추전국시대처럼 범람하며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특정 카테고리 내의 브랜드와 제품들이 국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조금은 낯선 풍경을 한 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 그밖의 일본이나 기타 국가들의 전형적인 유통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백화점에서 본 바로 그 가구’, ‘백화점과 똑같은 정품!’, 혹은 ‘연예인 아무개가 가지고 있는 제품’ 등의 경박한 온라인 광고 카피와 수많은 유튜버들의 깊이 없는 리뷰, 마치 매 시즌 유행이 급변하는 의류 시장의 신상 아이템처럼 왁자지껄 하게 유행, 유통되고 회자되는 모습은 조금 당황스럽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백화점 가구 코너에는 지금처럼 USM과 여타의 지금 유행하는 가구들은 눈에 띄지 않았었다. 최소 5,60년 이상의 전통이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예전부터 꾸준히 유통되어 왔던 물건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유행이 되고 갑자기 여기저기서 보인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어떤 제품이 유행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유통시장은 분명 상당히 다른 게 사실이다.
이렇게 특정 브랜드들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그 고유의 매력과 높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언급한 가구들이 어떤 공식처럼 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광경을 보면 그 공간의 소유자의 취향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루이 폴센의 조명과 프리츠한센의 테이블까지 있다면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한다. 브라운의 오디오(산업 디자인적 측면에서 좋아한다면 모르지만 좋은 소리를 위해서 브라운을 사는 하이파이 매니아는 없다)나 빈티지 뱅앤올룹슨, 혹은 JBL의 스튜디오 모니터나 탄노이의 동축 유닛 스피커까지 있다면 그건 용의자가 진범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비초에 선반에 매거진B나 월페이퍼 등의 잡지가 가로로 정갈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보통 남과 다른 것을 가짐으로써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괴이하게도 한국 소비자들은 남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압도적으로 더 커 보인다. 마치 모두가 보는 영화를 우르르 몰려가서 다같이 보는 천만 영화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달리 많은 것처럼.
공간은 그 공간을 소유한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공간에 투자를 하는건 의미 있는 행위이다. 좋은 공간에서 산다는 건 상당히 가치 있는 일이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그 공간에서 느끼고 싶은 안식은 모두 그 공간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떤 가구를 어떻게 배치하는가로 상당 부분 결정되기 때문이다. 좋은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의 욕망도 부끄러워 하거나 숨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취향 없는 소비와 과시의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그 공간은 생명력을 잃고 무의미한 몰취향의 모델하우스가 되고 만다. 근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바로크식 소파와 등나무 가구, 거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마치 같은 공간에서 충돌하고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알록달록 서랍장과 싸구려 샹들리에가 거실을 지배하던 혼돈의 시대는 이제 거의 갔지만(사실 아직도 그런 부모님 댁이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인테리어 잡지의 전형적인 한 페이지처럼 USM과 임스, 비초에로 가득 들어찬 공간이 더 매력적이라고 얘기 하기에도 뭔가 찜찜한 뒷맛이 분명 존재한다.
철물점에서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평범한 문손잡이보다는 논현동 가구거리의 철물 전문점에서 고른 이태리제 호페(Hoppe)가 멋지다는 걸 알게 되고 다음으로 그보다 조금 더 비싼 독일제 하펠레(Hafele) 손잡이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아직 정식 수입도 안된 덴마크의 디라인(D-line)을 알아버리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집안의 손잡이 몇개, 화장실 휴지걸이, 수건걸이, 선반 몇개만 달아도 기백만원의 지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디라인도 동일 제품군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는 아니다. 사람의 눈과 취향은 점점 더 비싸고 고급의 물건에 적응하고 만족을 느끼기 마련이다. 르코르뷔제의 그랜드콤포트 LC3 소파를 사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국내 업체의 무난한 가격, 무난한 디자인의 3인용 라텍스 소파에 눈길을 줄리 만무한 것처럼 눈과 취향, 그리고 소비의 규모는 하향 유턴하기 힘든 것이다.
소위 젊은 세대들이 인테리어와 가구, 하이파이 오디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수입가구의 경우 강남 논현동 가구거리와 청담동 수입가구 거리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부유한 소수의 소비층들을 타겟으로 한 시장만이 존재했을 뿐이었고 하이파이 오디오의 경우 충무로와 청계전, 용산전자상가를 무대로 하는 수입 오디오 업계가 중장년층의 남성 오디오 매니아들을 공략하는 지극히 작은 시장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21세기에 들어오고 온라인 마켓이 활성화 되면서 대중과 젊은층에는 낯설게 느껴지던 유럽의 비트라나 카시나, 혹은 미국의 허먼 밀러나 놀 등의 가구 제조, 유통 회사등의 제품들이 알려지면서 2,30대에게 임스나 프리츠한센, 카르텔과 르코르뷔제 같은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히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구들의 인기가 온라인 유통사의 마케팅으로 힘을 얻으면서 국내의 인테리어나 건축 잡지를 장식하던 제품군도 예전과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업이 판매하는(공급) 제품을 소비자는 구매한다(수요). 수입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제품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장에 USM과 임스, 비초에가 유통되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USM과 임스, 비초에를 살 수밖에 없다. 물론 조금 더 적극적이고 개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는 해외 직구나 중고 제품을 찾아 자신은 어딘가 다르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애쓰겠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공급되는 제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할 뿐이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비자의 수동성과 몰취향을 비판하기에 앞서 어떤 브랜드나 특정 제품이 너무 과다하게 지속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목격된다면 그 피로함이 혐오감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좋은 취향에 멋진 직업을 가졌다고 하는 이들의 공간을 소개하는 잡지 기사나 영상에 등장하는 원색의 판넬과 스틸 프레임을 뽐내며 서있는 USM 가구를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많이 목격했다. 모든 집이며 사무실들이 USM 쇼룸같아 보이는 이 생경한 장면들은 마치 수 년 전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모두 시커먼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다니던 풍경을 연상시킨다. 당시 미국 노스페이스의 회장은 한국에 산이 많아서 모두들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닌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농담처럼 돌기도 했었다. 스위스, 독일, 기능주의, USM, 바우하우스,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제, 놀, 임스, 비트라와 허먼밀러의 골수팬으로서 능력과 돈만 있다면 그들처럼 USM으로 거실을 꽉 채우고 살고 싶지만 아마도 내 평생 그 어떤 USM 제품도 나의 공간에 들어올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잡지에서, 영상에서 그들의 USM을 볼때마다 그 확신은 점점 더 강해진다.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럴 필요 없는 물건들조차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고 있다. 나는 홍대병에 걸린 장도연처럼 중증 환자는 아니지만 나에게 USM은 아마 철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멋진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면 가장 먼저 당신의 USM을 처분하길 바란다. 그곳은 당신 고유의 공간이 아니라 USM이 있는 또 하나의 쇼룸이자 모델하우스일 뿐이다. 적어도 백화점, 가구 멀티샵,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서 경쟁하듯 유통되고 있는 이 브랜드의 당황스러운 유행이 지속되는 한 말이다. 최근에 타계한 영국의 거장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윔블던 하우스의 실내에는 노란색 USM 장식장과 임스의 체어, 비초에의 벽선반 등이 그야말로 적절하고 근사하게 공간을 완성하고 있다. 평소 생각하는 완벽한 주택 디자인에 가장 근접한 공간이다. 그렇게 완벽한 공간에 완벽한 조합의 가구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겁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USM의 가구를 선물로 준다면 어떨까? 아, 나는 아마도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처럼 지독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음, 네.. 솔직히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 김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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