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의 일상은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시상자로 나섰던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두 거물급 헐리우드 스타 배우들의 무신경하고 무례했던 행동 때문에
당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이크로 어그레션 인종차별 행위가 실제로 있었느냐의 여부로 시끄럽고 어수선했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또 하나의 논쟁적인 장면이 전파를 탔다.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감독의
수상소감에 관객 일부의 열렬하거나 혹은 어색한 환호 속에 장내는 묘하게 얼어 붙었고 시상식 직후 수많은
유명인들과 피해 당사자, 일반인들의 소셜네트워크와 각종 언론은 해당 발언을 놓고 벌어진 갑론을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사자성이 없고 해외 이슈에 관심이 덜한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이 유태인이면서 전쟁의 참상과 나치의 잔인성을 고발한 작품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만든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입에서 이 영화가 그들이 그 때 무엇을 했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고 얘기하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만행을 비판하는
수상소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걸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독일군 장교 루돌프 회스 가족의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을 아름다운 미장센과 절제된 연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비록 실제했던 그 참상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유태인 희생자들의 참혹한 삶과 죽음, 고통이 오히려 극명하게 다가와 아프게 관객을 찌르는 이 영화는 이미 대작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감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했던 비극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들이 역사적 비극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만들었고 침해받지 않아야 할 것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더 잔인하고 더 악마적인 착취와 만행, 그에 따른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일상이 필연적으로 타인의 희생이나 고통을 담보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인과와 상관관계가 우리의 일상들 사이에 유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하기 일쑤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처럼 세상을 벽 너머와 안쪽으로 정확하게 양분할 수는 없지만 우리중 누군가는 벽 안쪽에, 또 다른 누군가는 벽 너머에 더 가까운 삶을 산다. 언급된 영화에서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모든 일상에는 그 표면 자체로는 확인 혹은 정의 불가한 단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의 요소들이 착취와 희생의 결과물이고 혹은 그 인과관계가 직결되지 않는 부분에도 어떤 이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짐짓 외면하고 적당히 무시하곤 한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소중한 일상이 외부적 요인이나 비판에 의해 침해 당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하고 즐기는 많은 상품들, 의류, 서비스들이 어떻게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내 앞에 도달하는가를 살펴보면 수많은 불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식생활 역시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자 일상이다. 우리는 음식에서 위로를 얻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에너지를 보충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음식, 음식에서 얻는 위안이 착취와 희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른척한다. 고단한 하루, 스트레스 쌓이는 업무의 끝에 즐기는 고기와 술의 달콤함은 언뜻 무해하고 결백해 보이지만 인류가 이런 일상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하고 견고한 장치는 무심하고 잔인하다. 수백억마리의 동물들이 매해 인간의 식욕을 위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의해 갇히고 고통받고 죽임을 당한다. 인간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들의 안위와 작은 행복, 소소한 일상을 뺏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나 고민도 없다. 위대한 음악가이자 열혈 동물권 운동가인 폴 매카트니는 “도축장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채식주위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 평온한 일상이 소중한 것처럼 어떤 생명도 착취 당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 감금 당하고 착취 당하는 삶을 동물들에게 강제할 권리가 당연히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설득하거나 가치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시스템 안에서 부품처럼 돌아가는
서민일 뿐이다. 지금도 20억이 넘는 인류가 극빈층이거나 절대 빈곤층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팍팍한 삶을 당연한 듯 부여받은 우리가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과 소소한 일상에 이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우리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앞으로도 그 대상이 누구이든 또 무엇이든 착취하고 통제할 것이며 고통받는 동물들의 삶도 크
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어떤 권리처럼 여기는 생각은 조금씩이라도 바꿔 나갔으면
좋겠다. 도축장의 벽을 유리로 만들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는 건 아주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28 ‘ORDINARY DAY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 OhBoy! No.128 MAY JUN 2024 ORDINARY DAYS 구매하기 |
벽 너머의 일상은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시상자로 나섰던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두 거물급 헐리우드 스타 배우들의 무신경하고 무례했던 행동 때문에 당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이크로 어그레션 인종차별 행위가 실제로 있었느냐의 여부로 시끄럽고 어수선했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또 하나의 논쟁적인 장면이 전파를 탔다.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감독의 수상소감에 관객 일부의 열렬하거나 혹은 어색한 환호 속에 장내는 묘하게 얼어 붙었고 시상식 직후 수많은 유명인들과 피해 당사자, 일반인들의 소셜네트워크와 각종 언론은 해당 발언을 놓고 벌어진 갑론을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사자성이 없고 해외 이슈에 관심이 덜한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이 유태인이면서 전쟁의 참상과 나치의 잔인성을 고발한 작품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만든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입에서 이 영화가 그들이 그 때 무엇을 했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고 얘기하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만행을 비판하는 수상소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걸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독일군 장교 루돌프 회스 가족의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을 아름다운 미장센과 절제된 연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비록 실제했던 그 참상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유태인 희생자들의 참혹한 삶과 죽음, 고통이 오히려 극명하게 다가와 아프게 관객을 찌르는 이 영화는 이미 대작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감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했던 비극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들이 역사적 비극을 더 강렬하게 느끼게 만들었고 침해받지 않아야 할 것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더 잔인하고 더 악마적인 착취와 만행, 그에 따른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일상이 필연적으로 타인의 희생이나 고통을 담보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인과와 상관관계가 우리의 일상들 사이에 유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하기 일쑤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처럼 세상을 벽 너머와 안쪽으로 정확하게 양분할 수는 없지만 우리중 누군가는 벽 안쪽에, 또 다른 누군가는 벽 너머에 더 가까운 삶을 산다. 언급된 영화에서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모든 일상에는 그 표면 자체로는 확인 혹은 정의 불가한 단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의 요소들이 착취와 희생의 결과물이고 혹은 그 인과관계가 직결되지 않는 부분에도 어떤 이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모르거나 알면서도 짐짓 외면하고 적당히 무시하곤 한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소중한 일상이 외부적 요인이나 비판에 의해 침해 당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하고 즐기는 많은 상품들, 의류, 서비스들이 어떻게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내 앞에 도달하는가를 살펴보면 수많은 불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식생활 역시 우리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자 일상이다. 우리는 음식에서 위로를 얻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에너지를 보충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음식, 음식에서 얻는 위안이 착취와 희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른척한다. 고단한 하루, 스트레스 쌓이는 업무의 끝에 즐기는 고기와 술의 달콤함은 언뜻 무해하고 결백해 보이지만 인류가 이런 일상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놓은 거대하고 견고한 장치는 무심하고 잔인하다. 수백억마리의 동물들이 매해 인간의 식욕을 위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의해 갇히고 고통받고 죽임을 당한다. 인간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들의 안위와 작은 행복, 소소한 일상을 뺏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나 고민도 없다. 위대한 음악가이자 열혈 동물권 운동가인 폴 매카트니는 “도축장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채식주위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 평온한 일상이 소중한 것처럼 어떤 생명도 착취 당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을 위해 감금 당하고 착취 당하는 삶을 동물들에게 강제할 권리가 당연히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설득하거나 가치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시스템 안에서 부품처럼 돌아가는 서민일 뿐이다. 지금도 20억이 넘는 인류가 극빈층이거나 절대 빈곤층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팍팍한 삶을 당연한 듯 부여받은 우리가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과 소소한 일상에 이면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우리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인류는 앞으로도 그 대상이 누구이든 또 무엇이든 착취하고 통제할 것이며 고통받는 동물들의 삶도 크 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어떤 권리처럼 여기는 생각은 조금씩이라도 바꿔 나갔으면 좋겠다. 도축장의 벽을 유리로 만들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는 건 아주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 김현성
* 기사 전문은 OhBoy! No.128 ‘ORDINARY DAY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hBoy! No.128 MAY JUN 2024
구매하기ORDINARY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