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lk about Good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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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을 얘기해보자

착하다, 상냥하다, 친절하다, 이타적이다.
착하다는 건 어떤 의미이고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착하게 살 필요는 있는 걸까? 
오보이 독자들이 생각하는 착한 사람에 대한 의미, 그리고 다양한 얘기들. 



IT TAKES COURAGE TO BE KIND | 이주영

어른이 되어갈수록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고, 손을 내미는 일이 이상할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은 늘 내 안에서 가장 크고 넓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려 하면 부끄러움이 앞섰다. 남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거절당할까 두려웠으며, 때로는 괜히 착한 척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도 망설였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친절해야 한다고, 남을 도와야 한다고,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배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는 또 다른 것을 배운다. 이용당하지 않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 너무 착하면 안 된다는 법. ‘호구’가 되지 않는 법. 그렇게 내 안의 ‘착함’은 조금씩 연기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럼에도 자라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착함의 씨앗들은, 20대 때 나는 시를 쓰며 조용히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직접 손을 내미는 용기는 부족했지만, 시만큼은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다가가 주는 것 같았다.

When your hands are too small, 
To carry all weight of sigh, 
Have a stand to sell, 
Every paper bag I’ll seal, 
For each and every one to be sold. 

손이 너무 작아 
모든 한숨의 무게를 
다 들 수 없다면, 

작은 노점 하나를 열어두세요. 

그러면 나는 모든 
한숨을 종이봉투에 담아 봉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팔려 나가게 해드릴게요.


돌이켜보면 내 안에는 한 사람의, 하나의 생명의 한숨조차 모두 들어줄 수 없다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모두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은 엉뚱한 상상을 했다. 작은 노점을 열어 한 존재의 한숨을 종이봉투에 담아 모두 팔아버리면, 그 존재의 세상은 조금 더 가벼워지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시 속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았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다정해지고 싶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나는 착함을 표현하는 용기를 조금씩 배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Dead Poets Society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We don’t read and write poetry because it’s cute. We read and write poetry because we are members of the human race. And the human race is filled with passion. And medicine, law, business, engineering, these are noble pursuits and necessary to sustain life. But poetry, beauty, romance, love, these are what we stay alive for. ”


오랫동안 나는 이 문장을 아름다운 문장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은 것은, 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유 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음의 이름은, 어쩌면 착함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안심했다. 안심해서 행복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시를 쓴 것은 2018년이었다. 그 이후 나는 약 8년 동안 다른 방식으로 그 마음을 세상에 건네는 시도를 했다. 유기견봉사를 정기적으로 기획하고, Sea Shepherd Korea에서 바다를 들어가 수중청소를 하고, 회사에서는 좋은 동료가 되기 위해,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말과 행동을 건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시간들은 분명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느새 안심보다는 ‘의무’를 품기 시작하였다. 의무는 나를 앞으로 걸어가게 했지만, 마음을 쉬게 하지는 못했다. 안심(安心). 걱정이나 불안, 염려가 없어지거나 덜어져 마음을 놓고 편안해지는 것. 나는 다시 안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시 시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시는 그 마음을 세상에 건네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마음을 밖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그 흐름이 착함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그 마음을 세상에 건네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안심시키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로 충분할 것 같다.



착하다는 것 | 정유진

“유진이는 참 착해.”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다. 어릴 때는 그 말이 좋았다. 칭찬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나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착한 사람아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 안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착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모습은 실망스러운 것처럼.

어릴 적 친구들과 학교를 마치고 무엇을 먹으러 갈지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떡볶이 먹으러 갈까?” 한 친구가 말하고 다른 친구도 동의했다. 그럴 때 나는 “나도 좋아.” 라고 말했다. 사실 내가 떡볶이를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친구들의 기대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만족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친구들이 웃으며 말했다. “유진이는 참 착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말이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이는 자기 의견을 잘 말하지 않아서 같이 다니기 편하다.’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착하다는 것은 정말 뭘까?’ 한동안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을 두고 “참 착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예의 바르고 선을 잘 지키지만,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착함은 단순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생각하는 착함은 이타적인 마음에서 시작된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마음.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말까지 기억해 주는 마음. 그리고 때로는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상대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오랜 시간 착한 사람으로 살아오며 한 가지 더 알게 되었다. 착함은 나를 지우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내 의견을 숨기고, 싫다는 말을 삼키고, 늘 양보하는 것이 착함이라면 결국 남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희생일지도 모른다. 그런 착함은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가는 내 마음이 먼저 지치고 말더라.

내가 생각하는 진짜 착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도 소중히 여기면서 타인도 존중하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줄 알고, 그럼에도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 나를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세상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한 사람, 또 한 사람 늘어난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다. 이제 누군가 내게 “참 착한 사람이네요.” 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더 이상 나를 가두는 틀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을 뜻하는 말이기를 바란다.

일상에서 만나는 착한 사람들이 나의 하루를 참 따뜻하게 채워준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돌이켜보면 나는 착한 사람일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착하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 강규원

예전의 저는 착하게 산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갈등을 만들지 않고, 가능한 한 모두와 잘 지내며,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착한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직장에는 나와 잘 맞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른 사람,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의 저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종종 누가 맞고 누가 틀린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왜 저렇게 일할까. 왜 저 이야기를 저런 방식으로 할까. 왜 저 사람은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것은,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속도를 우선시하고, 어떤 사람은 완성도를 우선시합니다. 나는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할 수 있고, 상대방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너무 성의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갈등이 악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과 기준 안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합니다. 다만 그 기준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착함은 상대방의 행동을 무조건 이해하거나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고, 판단을 잘못할 수 있고,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으며, 반대로 내가 보는 것을 상대방은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상대방의 부족함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을 이해한 상태에서 더 나은 방향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것밖에 못했어?”가 아니라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저 사람은 원래 저래.”가 아니라 “혹시 내가 모르는 배경이 있는 건 아닐까?” 라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부족할 수 있으며,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상태가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착하게 사는 것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하다는 것에 대해 | 김도영

PART 1. 僞善(위선) 말고 爲善(위선): 착하다는 낙인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착하다는 말은 이상한 칭찬이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그래도 착하긴 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도 그 뒤에는 침묵이 따라오거나 반전의 복선처럼 쓰인다. “근데 눈치가 없어”, “근데 일 처리가 서툴러” 같은 말들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면죄부처럼 쓰이곤 하니까. 가끔은 더 할 말이 없어서 꺼내는 마지막 장점 같기도 하다. “착해서 그렇다”거나 “그것도 못할 거면 착하기라도 해야지” 같은 말들로 ‘착함’은 어느새 가장 쉬운 덕목이자 가장 값싼 칭찬이 되었고, 손해와 유약함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에게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기분 좋은 칭찬이 아니라, 은근한 낙인이자 프레임처럼 다가왔다. 나 역시 그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한동안은 ‘착하다’라는 말을 듣는 게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일을 하며 장애인 분들을 만날 일이 많다.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내 일을 설명하다 보면, 대부분은 좋은 일 한다며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감정보다, 내가 오히려 사람을 배우고 있다는 마음에 가까웠기에 ‘착하다’는 말이 버거웠다. 평소에도 주변의 가까운 이름들을 챙기는 걸 좋아하고, 그들을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는 일에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모습까지 더해져 사람들은 나를 더욱 쉽게 착한 사람이라 여긴다.

착하다는 말은 때때로 사람을 납작하게 만든다. 타인을 향한 나의 태도가 그저 프레임에 갇힌 채 단순하게 소비될 때면, 억울함과 회의감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이 내게는 자연스러웠을 뿐인데. 내가 고민하며 내린 선택과 관계를 위해 감수한 시간까지도, 그저 ‘원래 착한 사람이니까’라는 하나의 성격으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착하다는 말의 의미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 나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위하는 ‘착함’에 마음을 소비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이다. 더운 날씨에 짜증이 나더라도 웃는 선택, 먼저 안부를 묻는 선택, 손해를 보더라도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선택. 나는 그런 선택을 좋아한다. 혼자만 잘 살아서 뭐 하겠나. 남들이 뭐라든 나는 그냥 이렇게 누군가를 위하며 다정하게 살고 싶은 사람인 것을.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데.

계산 없는 다정함을 향해 가끔은 위선(僞善)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물론 여전히 세상은 착하게 살지 말라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지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는 예전만큼 그 말이 무섭지 않다. 위선자로 보일지라도, 나는 기꺼이 선을 행하는 ‘위선(爲善)’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선택한 단단한 착함이자 세상의 시선에 대해 내가 고집하고 싶은 낭만이다. 괜찮다. 선의를 의심하는 일보다 선의를 실천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PART 2. 행간에 숨겨둔 마음: 다정함이 남긴 흔적

‘착하다’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지인에게 받았던 편지 한 장을 다시 읽게 됐다. 약간 바랜 종이, 또박또박 적은 글씨와 좁은 행간 사이에 숨겨진 문장 하나. “당신은 착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문장에 이상하게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내가 당연하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착한 사람’이란 기억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기뻤다. 결국 착하다는 말은 사전 속 뜻보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건네는지가 더 중요한 단어였다.

어쩌면 착하다는 건 결과가 아니라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를 한 번 더 생각했던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남는 것. 내가 베푼 마음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면, 그 작은 다정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비로소 믿게 된다.

철없는 이상주의자의 낭만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다정하고 선한 마음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는 일은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하루를 덜 외롭게 만들 수는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한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해질 수도 있으니까. 내가 행하는 아주 작은 착함이,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세상을 더 다정하게 바꾸어 놓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를 스쳐 간 누군가가, 혹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여전히 사람을 믿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고, 세상에 아직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한 번쯤 믿어 볼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도 나는 프레임에 갇힌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의 소중한 이름들에게 기꺼이 다정함을 선택하는 ‘단단하고 고집 센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나의 이 고집이 당신에게도 닿기를.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다정한 흔적으로 남을 당신이라면, 나는 오래도록 좋아할 자신이 있으니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한 거리 | 고운

살면서 “참 착한 사람이야.”라는 평가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과 가족에 충실했고, 언제나 올바른 태도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의 착함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지인이 자신이 직접 겪은 그 사람과의 좋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밝고 성실하다고 믿었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이야기였다. 그의 밝은 만큼이나 짙은 어둠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나는 예전처럼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었다.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취미를 함께하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어느 날 다른 지인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가까이 지낼 때는 전혀 몰랐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했을 때의 그는 그저 나에게 잘해주는 친절하고 나이스한 친구였을 뿐이었다.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한 걸음 떨어지고 나서야 보였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착한 사람’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고 해서 나에게도 반드시 착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더라도 나에게는 따뜻한 사람일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해도 실수를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은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품고 있던 한 사람의 ‘착함’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결국 나도, 그도,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도 모두 불완전하고 주관적인 존재일 뿐이다.

착함의 기준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 희생할 줄 아는 사람, 선의를 잃지 않는 사람이 착한 사람일 수도 있다. 기준은 다르지만 그 중심에는 타인을 향한 마음, 즉 이타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타적인 행동조차 언제나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때 플라스틱 봉지는 숲의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종이봉투를 대신할 친환경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플라스틱이 남긴 환경 문제를 이야기한다. 당시에는 선하다고 믿었던 선택이 시간이 지나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행동이 미래에도 옳다고 평가받을지, 누군가를 위해 한 희생이 모두에게 선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결국 ‘착함’은 절대적인 성질이라기보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에 따라 만들어지는 주관성 가득한 판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착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도, 반대로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를 오래도록 착한 사람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결점을 보게 되고, 멀어질수록 소문과 평가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저마다의 거리를 가지는 것, 어렵지만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한다. 나는 누군가를 ‘착한 사람’이라고 쉽게 정의하지 않고, 함께한 시간 속에 서로에게 선하려고 노력했다면 그것으로 이 애매하고 불완전한 기준에 라벨링을 해보려한다. 그것이 불완전한 사람을 바라보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 아닐까.



착하다 | 나선우

형용사.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선우는 진짜 착한 것 같아.” “넌 왜 이렇게 착하게 사는 거야?” “착한 척 하지 마.”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성인이 되기 전인 열아홉 살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였다. 학교에 새로 전학 온 친구들을 먼저 챙겼고, 욕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누군가를 돕고 먼저 행동하는 일은 성취감 때문이라기보다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동화 속에서는 언제나 선이 악을 이기고 착한 사람이 행복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착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착한 아이, 나선우’라는 모습이 참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관계는 조금 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착한 모습을 좋게 봤지만, 어떤 사람들은 가식이라며 “착한 척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큰 상처를 받았다. 화가 나도 “나도 화날 수 있어.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라고 말하지 못했다. 화를 내는 것조차 상대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속으로만 참는 일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 ‘나’를 주제로 발표를 준비한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 설명을 읽는 순간, 마치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착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나에게 “착한 척한다”고 말했는지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진심에서 비롯된 행동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행동들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발표에서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들을 꺼내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솔직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고, 춤과 그림으로도 감정을 표현해 보았다. 그렇게 조금씩 연습하다 보니 기쁨, 슬픔, 화남 같은 나의 감정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이자 30대의 어른이 되었다. 교실에서 어린 시절의 나와 닮은 아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진심보다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착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를 도와주려는 마음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먼저 친구가 스스로 해볼 기회를 주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먼저 소중히 하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면 더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누구는 참 착한 아이야.”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착함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습이 아니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짜 착한 사람의 모습이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40 ‘KIND HEART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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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Boy! No.140 MAY JUN JUL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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