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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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클래식, 새롭지만 영원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

어떤 디자인은 태어난 순간부터 오래 살아남을 운명을 타고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복제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도 않는다. 시간을 통과하는 힘은, 본질에 충실한 기능, 절제된 아름다움, 그리고 사람과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는 품질에서 나온다. 뉴 클래식은 그런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비해, 세상에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견고하게 느껴지는 것들. 과거의 영감을 존중하면서도, 지금 우리의 삶을 분명하게 지지하는 새로운 클래식. 제품 디자인과 서비스, 문화 콘텐츠와 아티스트, 그리고 삶의 작은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21세기의 시간성을 품은 새로운 아이콘들을 소개한다. 지금 이 순간 태어나, 앞으로도 오랫동안 곁에 머물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을 재정의할 수 있는, 새롭지만 영원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David Chipperfield
절제와 질서로 말하는 건축

서울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놓지 못하는 도시다. 도시의 건축물은 빠르게 철거되고, 그 위에 더 높고 더 눈에 띄는 것들이 쌓인다. 근대건축의 유산은 방치되거나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고, 공공성과 미감은 대체로 후순위로 밀린다. 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경관이 아니라 스펙 경쟁의 표면처럼 보인다. 빌딩마다 ‘브랜드’가 전면에 드러나고, 건물은 도시와 공존하기 보다 그저 소유주의 과시욕과 투자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이런 서울의 한복판, 용산이라는 혼잡하고 상업화된 공간 속에서,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보기 드물게 침착하고 균형 잡힌 건물이다. 반복되는 흰색의 수직 루버, 중앙에 뚫린 정사각형의 중정 구조는 이 거대한 오피스 건물에 묘한 가벼움을 부여한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단정하고 품위 있게 자리를 지킨다. 

이 건물을 설계한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는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온 인물이다. 그는 스타 건축가의 화려한 언어 대신, 절제된 형태와 명확한 기능, 그리고 재료 본연의 물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건축을 다룬다. 

치퍼필드의 건축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누군가 왜 좋은지 설명해야 한다면 그 건물은 쓸모없는 것이다. 건축에 대해 충분히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건축은 여러 측면에서 효과가 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에게 건축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말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항상 그 공간이 놓인 도시, 문화, 역사와의 조화를 고민한다. 도시성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대안을 제시하는 건축. 

치퍼필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베를린의 Neues Museum 복원 프로젝트는 그의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는 낡은 구조를 제거하거나 덧칠하지 않고, 손상된 흔적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새로움을 제시했다. “복원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쌓는 작업”이라는 그의 표현은, 치퍼필드 건축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작업인 멕시코의 Museo Jumex, 베니스의 Procuratie Vecchie, 런던의 Turner Contemporary, 상해의 Zikawei Library, 그리고 세계 각지의 박물관, 호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들은 모두 이 ‘질서 있는 건축 언어’의 다양한 변주다. 치퍼필드의 건축은 단단한 구조 안에서 시간과 빛이 머무는 틈을 남긴다. 바로 그 틈 덕분에, 그의 건축은 빠르게 소비되지 않고,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든다. 

그는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머무르기 위한 건축을 만든다. 도시를 떠들썩하게 하지 않고, 도시를 잠시 멈춰 세우는 방식으로.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스타 건축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고전의 태도를 잃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도시와 건축이 너무 가볍고 빠르게 소비되는 시점에서, 그의 작업은 ‘뉴클래식’이라는 말이 왜 여전히 유효한지를 증명하고 있다. 



©D&Department


D&Department
지속의 미학, 일상의 형식

2000년, 산업 디자이너이자 아트 디렉터인 나가오카 겐메이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며, 지역성과 맥락, 그리고 ‘오래 쓸 수 있는 디자인’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D&DEPARTMENT는 그렇게 세상에 출발을 알렸다. 이름의 d는 디자인(design), DEPARTMENT는 백화점이 아닌 ‘지역의 생활과 연결된 품목들을 소개하는 섹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D&DEPARTMENT는 단순한 편집숍이 아닌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을 테마로, 오래도록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발굴하고 지역다움을 전하는 상점으로, 오래된 지역 제조업체와의 협업, 과거에 생산되었지만 지금도 기능을 다하는 제품의 재발견, 그리고 지역 식문화와의 연결까지, 디자인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 쌓아온 시간과 관계를 되새기고 공유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들의 로컬 가이드북 시리즈는 한 지역을 ‘디자인적으로’ 조망하는 방식의 표본처럼 읽힌다. 전통 공예, 마을의 식당, 로컬 브랜드의 포장지까지. 모든 것은 ‘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시대성과 맥락을 가진 이야기로 묶인다. 

D&DEPARTMENT 서울은 한남동, 제법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외의 오랜 디자인 제품은 물론, 한국 각 지역의 공예품, 오래된 식기 브랜드, 지역 식자재 등을 함께 소개하며 특히 ‘지속가능한 디자인’이라는 키워드가 단지 환경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습관과 연결된 감각의 문제라는 걸 조용히 말해준다. 

D&DEPARTMENT는 디자이너 브랜드처럼 화려하지 않고, 라이프스타일 숍처럼 유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물건은 모두 어떤 시간과 맥락을 통과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물건은 왜 여전히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본질과 맥락, 지역성과 지속성,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랜 세월 쓰일 수 있는 미감. 이모든 것을 성실하게 실현하고 있는 브랜드인 D&DEPARTMENT는 지금보다 미래에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기억될 브랜드일지도 모른다.



©Lemaire


Lemaire
시간을 입는 법

파리에서 시작된 브랜드 르메르는 단순히 프렌치 시크라는 말로는 포괄할 수 없는 정제된 언어를 가지고 있다. 기념적인 협업도 드물며, 런웨이조차도 조용하다. 

르메르의 옷은 명확하다.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으며, 기능과 형태, 실루엣이 균형을 이룬다. 르메르의 옷은 단순하지만 비어 있지 않고, 절제되어 있지만 감정이 배어있다. 넉넉하지만 처지지 않고, 구조적이지만 경직되지 않는다. 

르메르는 동시대 패션의 정반대편에 있다. 컬렉션마다 새로워야 하고, 협업은 화제가 되어야 하며, 그 어느 때보다 브랜드명이 중요해진 시대에 옷 자체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승부한다. 르메르는 무분별한 유행 소비에 대한 조용한 반대자다. 단발성 트렌드와 로고 플레이, 과장된 실루엣이 지배하는 시장 안에서, 절제된 감각, 오래 입을 수 있는 품질, 공간감 있는 옷의 구조는 뉴클래식이란 키워드를 이해하는 기준점이 된다. 

르메르는 옛것을 흉내 내지 않는다. 빈티지한 것도 아니고, 레트로도 아니다. 그들의 옷은 오히려 매우 동시대적이다. 오늘의 일상에 꼭 맞게 설계되었지만, 내일에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균형 위에 있다. 재단은 날카롭고, 원단은 정직하며, 색상은 자연스럽다. 브라운, 네이비, 오트밀, 다크 그린 같은 색조는 감정을 자극하기보다는 정돈하게 만든다. 

르메르는 “옷을 오래 입는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브랜드다. 이는 단지 지속가능성이나 윤리적 생산방식을 따랐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디자인 자체가 유행을 거부하고, 품질은 시간을 견디는 것. 그래서 르메르의 옷은 늘 비슷하지만 지겹지 않고 친숙하다. 기능과 구조, 그리고 시간성을 고려한 디자인은 결국 “옷이 삶에 스며드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르메르는 과거의 스타일을 계승했다기보다는, 동시대의 새로운 기준을 정립하고 있는 브랜드다. ‘클래식’이라는 말이 옛것의 복원이 아니라, 좋은 것이 반복되어 쌓인 시간의 집합이라면, 르메르는 그 기준을 정교하게 보여준다. 단지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옷’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갱신해온 결과인 셈이다.



©Apartamentomagazine


Apartamento Magazine
기획된 진부함, 디자인된 무심함

200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된 독립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apartamento 매거진의 표지는 단 한 번도 ‘매거진스럽게’ 보인 적이 없다. 건축 전문 사진가가 라지 포맷 카메라로 치밀하게 준비된 조명과 수직, 수평선을 세심하게 조정하여 촬영한 인테리어 사진, 굵은 대문자의 카피 문장 따위는 없다. 대신 마치 “우린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묘하게 평범한 듯 비범하면서 조용하고 다소 엉뚱하기까지 한 사진 한 장이 전면을 차지한다.

이 잡지의 표지는 언제나 실제 인물의 실제 공간에서 나온 순간들을 포착한다. 부엌의 먹다 만 파스타 옆에서 고양이를 안고 있는 노인, 오래된 아파트 거실에 쌓인 책더미 위에 털 슬리퍼를 신고 기대어 있는 남자, 반려견들이 쉬고 있는 옆에서 한가로이 거품 목욕을 즐기는 여성이 표지를 장식한다. 억지로 연출되지 않은 이 이미지들은, 페이지 속 이야기와 완벽하게 연결된 ‘감정의 전초전’으로 기능한다. ‘취향 있는 삶’이 아니라, ‘삶이 취향이 된 장면’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또한 apartamento의 표지는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공간과 시간, 사람의 태도와 감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잡지의 핵심인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표지만으로도 이미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기술적 완성도나 포토샵의 정교함 대신, apartamento는 표지를 통해 우리에게 감각의 기준을 재정립하라고 요청한다. 그들의 표지는 ‘디자인된 무심함’을 통해, 시각적 정보 과잉의 시대에 숨 쉴 틈이 있는 시선을 제안한다. 매 호 표지가 달라도 전체적인 일관성과 철학이 느껴지는 이유다.

이러한 감성과 접근법은 단순한 유행이나 ‘한정판’ 같은 개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이게 좋았다는 걸 더 잘 알게 되는 것’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apartamento는 종이 잡지라는 매체 자체가 소멸되고 모든 정보가 온라인으로 유통되고 있는 시대에, 오히려 종이라는 전통의 소재를 통해 그들만의 유일한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언젠가 종이 잡지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 가치는 누군가의 서재에 남게 될 것이다.



©NudieJeansCo


Nudie Jeans
오래 입을수록 멋있어지는, 진짜 옷

스웨덴의 데님 브랜드 누디진은 윤리적 패션이라는 테마를 가장 단순하고 구체적인 옷, 데님에 적용한 브랜드다. 100% 유기농 면 사용, 무료 수선 서비스, 리사이클 및 리유즈 시스템은 모두 “덜 사고, 오래 입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이 단지 지속가능성만으로 정의되진 않는다. 

누디진은 브랜드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방식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날 것 그대로의 청바지 사진, 소유자가 직접 수선한 흔적을 그대로 담은 이미지, 클래식한 타이포그래피와 로우톤의 색상 조합, 그리고 실제 사용자 중심의 자연스러운 비주얼 캠페인은 누디진이라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감각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패션 이미지의 전형인 ‘광고적 포즈’나 ‘이상화된 모델’ 대신, 일상에 가까운 인물과 공간, 그리고 낡아갈수록 멋이 더해지는 소재의 질감에 초점을 맞춘 시각 언어는, 데님이란 옷에 대한 새로운 클래식을 암시한다. 더 돋보이기보다는 오래 버티는 것. 남의 눈보다 자기 몸에 익는 것. 이런 태도는 누디진이 지향하는 시각성과도 정확히 겹친다. 

그럼에도 이 브랜드는 전통적인 명품처럼 과시적 상징이나 브랜드 파워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브랜드를 통해 어떤 신분이나 계급을 상징하려는 사람들에겐 어쩌면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물건의 지속성, 맥락, 그리고 손에 익는 시간의 미학을 중시하는 이들에겐 오히려 그 조용함이 신뢰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누디진은 ‘뉴클래식’이라는 말이 단지 복고적 디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은 새로운 윤리와 감각, 그리고 오래 입을수록 더 멋있어지는 옷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34 ‘NEW CLASSIC’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hBoy! No.134 MAY JUN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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