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전형적인 내향인으로 태어났다
김도훈
망했다고 생각했다. 첫 단독 인터뷰였다. 처음으로 배우를 홀로 인터뷰해야 하는 날이었다. 인터뷰 장소는 강남에 있던 카페였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도착해서 인터뷰 질문지를 작성하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토했다. 뭘 잘 못 먹은 건 아니었다. 그날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너무 긴장이 되면 식욕도 사라진다. 속을 비워내며 생각했다. 나는 망했다. 잘못 선택했다.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 기자라는 건 내향인이 선택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2시간 동안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내향인의 인생 계획에 없었다.
나는 전형적인 내향인으로 태어났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걸 깨달은 건 유치원 시절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유치원에 가는 게 지옥 같았다. 지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마산 성지유치원을 다녔다. 성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여러분은 눈치챘을 것이다. 가톨릭 유치원이다. 가톨릭 유치원이고 불교 유치원이고 자시고 나는 유치원이 싫었다. 왜 말도 안 통하는 애들과 같은 옷을 입고서 한 자리에 모여 동화 같은 걸 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서 홀로 SF 소설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유년이었다. 고고한 영혼이었다.
모든 내향인은 교정 시설에 들어가야 한다. 학교라는 교정 시설이다. 학교에 가는 길이 신나는 외향인 아이와는 달리 내향인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끌려가듯 학교에 간다. 핑크 플로이드의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으신가? 바로 그것이 내향인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예로 들고자 했으나 그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 같다. 핑크 플로이드 뮤직비디오 정도면 적절할 것이다. 나는 학교라는 교정 시설에서 끝없이 교정 당했다. 왼손잡이던 내가 오른손을 쓰도록 교정 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부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직책들을 받았다. 학급 위원, 반장, 부반장, 청소년연맹 단장 등등, 내 이름표에는 끝없는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나는 축구도 하지 않는 초등학생이었다. 시간만 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문학 전집 따위를 읽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좋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가야 했다.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다. 담임이 지목했으므로 나갔을 뿐이다. 그놈의 학교는 80년대에도 전교 회장을 전 학생 선거로 뽑았다. 나는 교단에 올라가 운동장 가득한 전교생을 보며 연설까지 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맡은 일은 뭐든지 최고로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내향인이었다는 것이다. 연설을 기가막히게 해버렸다. 나는 전교 회장이 됐다. 그로부터 1년은 책임감과 본성 사이에서 갈가리 찢어진 채 울부짖는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해였다.
내 인생은 끝없이 외향인이 되기를 강요받는 내향인의 지옥, 아니 지옥은 좀 너무하다. 연옥 정도 될 것이다. 내향인의 연옥이었다. 계속 직책을 맡았다. 조용히 살 수가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 아니다. 나는 내향인을 외향인으로 만들려고 기를 쓰는 세상을 문제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문제였다. 나는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내향인인 주제에 극외향인을 연기하는 기막힌 재능이 있었다. 사실 이 재능을 살리고 싶어 주변 몇몇 감독들에게 엑스트라라도 좀 시켜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거절당했다. 외모로 보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두 가지 정도다. 고아 출신으로 총을 들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한국전쟁 병사, 혹은 부산 광안리 횟집마다 자릿세 수금하러 다니는 조폭 일당 세 번째 칼잡이다. 해운대 갈 실력은 없어서 광안리에서 삥을 뜯고 사는 놈이다. 요즘은 전쟁물이나 조폭물은 인기가 없다. 내 역할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오십 인생을 지속적으로 연기해 왔다. 연기를 오래 하면 그건 더는 연기가 아닌 뭔가가 된다. 현실에 가까운 뭔가가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진정한 나 사이에는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오해가 생긴다. 아니다. 그것은 더는 오해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젠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첫 인터뷰로부터 20년, 나는 더는 인터뷰 질문지도 미리 준비하지 않는 기자가 됐다. 그냥 앉아서 눈만 보면 묻고 싶은 소리가 줄줄 나오는 인간이 됐다. 수백 명을 앞에 두고 행사를 진행해도 전혀 떨지 않는 인간이 됐다. 나는 이제 외향인인 것인가? 내향인에 대한 글을 이렇게 쓰고 앉아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걸까? 재차 확인하기 위해 글쓰기를 멈추고 다시 MBTI 검사를 했다. 역시다. 인프피(INFP)다. 내향인 중의 내향인으로서, 연애하기 가장 까탈스러운 유형이라는 그 인프피다. 이걸 밝히는 순간 연애는 포기해야 한다고 들었다. 상관없다. 인프피는 연애 따위는 무슨, 굳이 외향적으로 살아야 한다면 인생도 포기할 수 있는 유형의 내향인이다.
물론이다. 영원히 내향인으로만 살 수 있는 내향인은 없다. 완벽한 내향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완벽한 내향인으로 살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겠는가. 만화가? 사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 이유는 어린 시절 봤던 만화가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양이를 키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뭔가 따뜻한 존재와 살고는 싶지만 사람이나 개와 살 수는 없다. 내향인에게 타인은 고통이다. 개는 고통이 아니다. 개와 매일 수행해야 하는 산책은 고통이다. 답은 고양이뿐이다. 그 시절도 끝났다. 요즘 만화가는 만화만 잘 그려서는 안 된다. 홍보도 해야 한다. 인스타도 해야 하고 심지어 틱톡도 해야 한다. 팬들과의 만남도 해야 한다. 방구석에 처박혀서만 할 수 있는 직업은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39 ‘i WILL SURVIV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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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형적인 내향인으로 태어났다
김도훈
망했다고 생각했다. 첫 단독 인터뷰였다. 처음으로 배우를 홀로 인터뷰해야 하는 날이었다. 인터뷰 장소는 강남에 있던 카페였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도착해서 인터뷰 질문지를 작성하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토했다. 뭘 잘 못 먹은 건 아니었다. 그날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너무 긴장이 되면 식욕도 사라진다. 속을 비워내며 생각했다. 나는 망했다. 잘못 선택했다.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 기자라는 건 내향인이 선택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2시간 동안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내향인의 인생 계획에 없었다.
나는 전형적인 내향인으로 태어났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걸 깨달은 건 유치원 시절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유치원에 가는 게 지옥 같았다. 지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마산 성지유치원을 다녔다. 성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여러분은 눈치챘을 것이다. 가톨릭 유치원이다. 가톨릭 유치원이고 불교 유치원이고 자시고 나는 유치원이 싫었다. 왜 말도 안 통하는 애들과 같은 옷을 입고서 한 자리에 모여 동화 같은 걸 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서 홀로 SF 소설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유년이었다. 고고한 영혼이었다.
모든 내향인은 교정 시설에 들어가야 한다. 학교라는 교정 시설이다. 학교에 가는 길이 신나는 외향인 아이와는 달리 내향인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끌려가듯 학교에 간다. 핑크 플로이드의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으신가? 바로 그것이 내향인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예로 들고자 했으나 그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 같다. 핑크 플로이드 뮤직비디오 정도면 적절할 것이다. 나는 학교라는 교정 시설에서 끝없이 교정 당했다. 왼손잡이던 내가 오른손을 쓰도록 교정 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부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직책들을 받았다. 학급 위원, 반장, 부반장, 청소년연맹 단장 등등, 내 이름표에는 끝없는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나는 축구도 하지 않는 초등학생이었다. 시간만 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문학 전집 따위를 읽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좋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가야 했다.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다. 담임이 지목했으므로 나갔을 뿐이다. 그놈의 학교는 80년대에도 전교 회장을 전 학생 선거로 뽑았다. 나는 교단에 올라가 운동장 가득한 전교생을 보며 연설까지 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맡은 일은 뭐든지 최고로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내향인이었다는 것이다. 연설을 기가막히게 해버렸다. 나는 전교 회장이 됐다. 그로부터 1년은 책임감과 본성 사이에서 갈가리 찢어진 채 울부짖는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해였다.
내 인생은 끝없이 외향인이 되기를 강요받는 내향인의 지옥, 아니 지옥은 좀 너무하다. 연옥 정도 될 것이다. 내향인의 연옥이었다. 계속 직책을 맡았다. 조용히 살 수가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 아니다. 나는 내향인을 외향인으로 만들려고 기를 쓰는 세상을 문제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나였다. 내가 문제였다. 나는 연기에 재능이 있었다. 내향인인 주제에 극외향인을 연기하는 기막힌 재능이 있었다. 사실 이 재능을 살리고 싶어 주변 몇몇 감독들에게 엑스트라라도 좀 시켜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거절당했다. 외모로 보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두 가지 정도다. 고아 출신으로 총을 들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한국전쟁 병사, 혹은 부산 광안리 횟집마다 자릿세 수금하러 다니는 조폭 일당 세 번째 칼잡이다. 해운대 갈 실력은 없어서 광안리에서 삥을 뜯고 사는 놈이다. 요즘은 전쟁물이나 조폭물은 인기가 없다. 내 역할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오십 인생을 지속적으로 연기해 왔다. 연기를 오래 하면 그건 더는 연기가 아닌 뭔가가 된다. 현실에 가까운 뭔가가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진정한 나 사이에는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오해가 생긴다. 아니다. 그것은 더는 오해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젠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첫 인터뷰로부터 20년, 나는 더는 인터뷰 질문지도 미리 준비하지 않는 기자가 됐다. 그냥 앉아서 눈만 보면 묻고 싶은 소리가 줄줄 나오는 인간이 됐다. 수백 명을 앞에 두고 행사를 진행해도 전혀 떨지 않는 인간이 됐다. 나는 이제 외향인인 것인가? 내향인에 대한 글을 이렇게 쓰고 앉아 있어도 괜찮은 것인가?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걸까? 재차 확인하기 위해 글쓰기를 멈추고 다시 MBTI 검사를 했다. 역시다. 인프피(INFP)다. 내향인 중의 내향인으로서, 연애하기 가장 까탈스러운 유형이라는 그 인프피다. 이걸 밝히는 순간 연애는 포기해야 한다고 들었다. 상관없다. 인프피는 연애 따위는 무슨, 굳이 외향적으로 살아야 한다면 인생도 포기할 수 있는 유형의 내향인이다.
물론이다. 영원히 내향인으로만 살 수 있는 내향인은 없다. 완벽한 내향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완벽한 내향인으로 살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겠는가. 만화가? 사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 이유는 어린 시절 봤던 만화가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양이를 키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뭔가 따뜻한 존재와 살고는 싶지만 사람이나 개와 살 수는 없다. 내향인에게 타인은 고통이다. 개는 고통이 아니다. 개와 매일 수행해야 하는 산책은 고통이다. 답은 고양이뿐이다. 그 시절도 끝났다. 요즘 만화가는 만화만 잘 그려서는 안 된다. 홍보도 해야 한다. 인스타도 해야 하고 심지어 틱톡도 해야 한다. 팬들과의 만남도 해야 한다. 방구석에 처박혀서만 할 수 있는 직업은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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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Boy! No.139 MAR APR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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