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막힌 아재의 음악 편력기
오보이 편집장 김현성
내 귀가 막혀버린 이유
맞다. 기가 막힌 게 아니고 귀가 막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 듣는 일은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2000년대 이후 나온 음악은 도무지 나를 매혹시키지 못한다. 녹음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음악 제작 전반과 마케팅 노하우도 세련되게 진화했을 것이다. 분명 세상에는 엄청나게 좋은 음악이 넘쳐나고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혹은 어떤 초현실적 이유 때문이든 내 귀는 어느 순간 꽉 막혀버렸다.
나는 더 이상 음악을 듣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 지금은 매일같이 80년대부터 들어 오던 구닥다리 음악만 되풀이해서 듣는다. 거실의 오래 된 턴테이블과 CD 플레이어만이 나의 유일한 음악 창구다. 휴대폰에는 어떤 음악 앱도 깔려있지 않고 당연히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일도 없다. 그렇게 듣는 음악은 텅 빈 껍데기 같고,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도 설렘도 없다. 나는 단단한 편견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내 귀는 오늘도 꽉 막혀 있다.
음악이 초딩의 마음을 흔들다
음악이 처음으로 내 가슴을 두드린 건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현대건설 산업역군으로 중동 건설 현장을 오가셨다. 1년에 한두 번 귀국하실 때마다 아버지가 사 오시던 아바, 보니엠, 록시뮤직의 카세트테이프는 어린 나에게는 일종의 문화충격처럼 다가왔다. 카세트테이프, LP와 함께 사오신 마란츠 오디오로 듣던 음악들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아바의 음악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사운드트랙이자 지금도 내 플레이리스트 최상단에 자리한 불멸의 이름이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는 한국방송 4개와 영어 방송 1개가 나왔다. 채널이 5개밖에 없는 세상은 참 심플하고 편했다. 그 영어 방송은 정확하게 말해서 주한미군을 위한 채널이었다. AFKN이 채널 이름이었는데 매주 미국과 영국등의 뮤지션들이 나와서 라이브를 하거나 멋진 뮤직비디오들을 틀어주는 방송이 나왔다. 그 때 비디오 플레이어라는 게 세상에 나왔다. 나는 음악 방송과 뮤직비디오들을 무작정 녹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었다. 두시간짜리 테이프에 꽉꽉 채워 녹화를 했다. 테이프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때 녹화했던 소니 베타 테이프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넣어놨다. 언젠가 테이프의 내용을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 시절의 추억들을 되돌아보고 싶다.

아버지가 중동 국가에서 구입한 Roxy Music ‘Manifesto’ 1979 카세트 테이프.
별것도 아닌 사진에 굵은 마커로 일일이 검열한 커버는 어린 아이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기만 했다.
OTT에서 흡연 장면을 흐리게 처리하면 오히려 더 눈길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채널 2번에서 나오던 AFKN방송은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특히 음악 관련 방송과 뮤직비디오는 중학생이었던 꼬마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엘튼 존, 컬처클럽, 듀란듀란, 덱시스미드나잇러너즈.
소니 베타 비디오 테이프는 뮤지션들의 향연으로 가득 채워졌다.
지금은 재생할 수 없는 봉인된 기억들.
굿 올드 패션드 러버보이
중학교 2학년 때 반친구였던 기철이가 나에게 믹스테이프를 하나 선물했다. 퀸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음악이 있을 수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중학생 꼬마에게 퀸의 음악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록 오페라였다. 시간만 나면 신촌의 목마레코드로 달려갔다. 돈만 생기면 퀸의 앨범을 한 장씩 사 모았다. 나중에서야 한국에서 나온 퀸의 앨범에는 금지곡을 이유로 실리지 않았던 곡 투성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졌다. 그 후 이런저런 록과 프로그레시브 음악에 빠졌고 이제 음악을 좀 듣는다고 자부하던 고등학생이 된 나는 핑크플로이드에 빠져버렸다.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퀸처럼 한순간에 충격처럼 다가오는 음악도 아니었지만 영화로 풀어낸 더 월은 그 당시에 느꼈던 가장 큰 시청각적 충격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모 음악잡지 이벤트에 응모하여 상품으로 LP를 받게 됐다. 당첨됐지만 상품을 배송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 동쪽 끝자락에 있던 잡지사에 직접 LP를 받으러 가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사한 인간들이었지만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노하거나 부당한 일에 의문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어렸던 그때의 나는 그저 행복에 겨워 단박에 그 잡지사로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선 중딩 꼬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잡지사 직원들중의 하나가 귀찮다는듯 앨범 하나를 골라서 가져가라며 구석 바닥에 있는 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신중하고 신중하게 알란파슨스프로젝트의 84년 앨범 ‘암모니아애비뉴’를 고른 나는 뛰어오를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LP를 턴테이블에 걸었다. 그들의 가장 큰 히트곡은 아니지만 앨범에 실린 ‘돈 앤서 미’는 아직도 나의 가장 최애곡중의 하나이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36 ‘RETRO MANIA’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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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막힌 아재의 음악 편력기
오보이 편집장 김현성
내 귀가 막혀버린 이유
맞다. 기가 막힌 게 아니고 귀가 막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 듣는 일은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2000년대 이후 나온 음악은 도무지 나를 매혹시키지 못한다. 녹음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음악 제작 전반과 마케팅 노하우도 세련되게 진화했을 것이다. 분명 세상에는 엄청나게 좋은 음악이 넘쳐나고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혹은 어떤 초현실적 이유 때문이든 내 귀는 어느 순간 꽉 막혀버렸다.
나는 더 이상 음악을 듣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 지금은 매일같이 80년대부터 들어 오던 구닥다리 음악만 되풀이해서 듣는다. 거실의 오래 된 턴테이블과 CD 플레이어만이 나의 유일한 음악 창구다. 휴대폰에는 어떤 음악 앱도 깔려있지 않고 당연히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일도 없다. 그렇게 듣는 음악은 텅 빈 껍데기 같고,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도 설렘도 없다. 나는 단단한 편견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내 귀는 오늘도 꽉 막혀 있다.
음악이 초딩의 마음을 흔들다
음악이 처음으로 내 가슴을 두드린 건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현대건설 산업역군으로 중동 건설 현장을 오가셨다. 1년에 한두 번 귀국하실 때마다 아버지가 사 오시던 아바, 보니엠, 록시뮤직의 카세트테이프는 어린 나에게는 일종의 문화충격처럼 다가왔다. 카세트테이프, LP와 함께 사오신 마란츠 오디오로 듣던 음악들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아바의 음악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사운드트랙이자 지금도 내 플레이리스트 최상단에 자리한 불멸의 이름이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는 한국방송 4개와 영어 방송 1개가 나왔다. 채널이 5개밖에 없는 세상은 참 심플하고 편했다. 그 영어 방송은 정확하게 말해서 주한미군을 위한 채널이었다. AFKN이 채널 이름이었는데 매주 미국과 영국등의 뮤지션들이 나와서 라이브를 하거나 멋진 뮤직비디오들을 틀어주는 방송이 나왔다. 그 때 비디오 플레이어라는 게 세상에 나왔다. 나는 음악 방송과 뮤직비디오들을 무작정 녹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었다. 두시간짜리 테이프에 꽉꽉 채워 녹화를 했다. 테이프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때 녹화했던 소니 베타 테이프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넣어놨다. 언젠가 테이프의 내용을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 시절의 추억들을 되돌아보고 싶다.
아버지가 중동 국가에서 구입한 Roxy Music ‘Manifesto’ 1979 카세트 테이프.
별것도 아닌 사진에 굵은 마커로 일일이 검열한 커버는 어린 아이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기만 했다.
OTT에서 흡연 장면을 흐리게 처리하면 오히려 더 눈길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채널 2번에서 나오던 AFKN방송은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특히 음악 관련 방송과 뮤직비디오는 중학생이었던 꼬마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엘튼 존, 컬처클럽, 듀란듀란, 덱시스미드나잇러너즈.
소니 베타 비디오 테이프는 뮤지션들의 향연으로 가득 채워졌다.
지금은 재생할 수 없는 봉인된 기억들.
굿 올드 패션드 러버보이
중학교 2학년 때 반친구였던 기철이가 나에게 믹스테이프를 하나 선물했다. 퀸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음악이 있을 수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중학생 꼬마에게 퀸의 음악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록 오페라였다. 시간만 나면 신촌의 목마레코드로 달려갔다. 돈만 생기면 퀸의 앨범을 한 장씩 사 모았다. 나중에서야 한국에서 나온 퀸의 앨범에는 금지곡을 이유로 실리지 않았던 곡 투성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졌다. 그 후 이런저런 록과 프로그레시브 음악에 빠졌고 이제 음악을 좀 듣는다고 자부하던 고등학생이 된 나는 핑크플로이드에 빠져버렸다.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퀸처럼 한순간에 충격처럼 다가오는 음악도 아니었지만 영화로 풀어낸 더 월은 그 당시에 느꼈던 가장 큰 시청각적 충격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모 음악잡지 이벤트에 응모하여 상품으로 LP를 받게 됐다. 당첨됐지만 상품을 배송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 동쪽 끝자락에 있던 잡지사에 직접 LP를 받으러 가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사한 인간들이었지만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노하거나 부당한 일에 의문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어렸던 그때의 나는 그저 행복에 겨워 단박에 그 잡지사로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선 중딩 꼬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잡지사 직원들중의 하나가 귀찮다는듯 앨범 하나를 골라서 가져가라며 구석 바닥에 있는 박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신중하고 신중하게 알란파슨스프로젝트의 84년 앨범 ‘암모니아애비뉴’를 고른 나는 뛰어오를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LP를 턴테이블에 걸었다. 그들의 가장 큰 히트곡은 아니지만 앨범에 실린 ‘돈 앤서 미’는 아직도 나의 가장 최애곡중의 하나이다.
* 기사 전문은 OhBoy! No.136 ‘RETRO MANIA’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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