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훈
이 몸은 고양이입니다. 이름은 한솔로입니다. 이 인간은 저를 데려와서 '스타워즈' 캐릭터 이름을 붙이는 희한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2024년에는 한솔로가 누군지 아무도 모릅니다. MZ세대는 더 모릅니다. 다들 그냥 솔로라고 부릅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이 인간은 한 씨도 아닙니다. 흔한 김 씨입니다. 그러니 그냥 솔로라고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저도 한솔로라고 불린 적은 별로 없습니다. 사실 솔로가 저에게 더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이 인간은 거의 십여 년째 솔로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제가 쓰고 있느냐. 아닙니다. 이 인간이 쓰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며칠을 징징대더니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흉내 내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만날 칼럼이나 써서 먹고사는 주제에 스스로를 문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기특합니다. 그딴 칼럼이나 써서 저를 17년째 먹여 살리고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먹여 살리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사실 제가 먹여 살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를 소재로 칼럼을 얼마나 많이 써재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아직도 캣닙 한 줌 값 정도 들어오는 인세는 다 제가 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참 작가란 편한 직업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작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매일 빈둥거리며 지내면서도 작가를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고양이라고 하지 못하란 법도 없겠습니다. 게다가 사십 대 인간이 고양이에 빙의해서 글을 쓰는 거 좀 낯간지러운 일이긴 합니다. 용서하죠 뭐. 나쓰메 소세키는 1867년에 태어나 1905년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하고 1916년에 죽었습니다. 마흔아홉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인간 나이가 지금 마흔아홉입니다. 설마 이걸 쓰고 죽진 않겠죠. 그러기에 저는 지나치게 건강합니다. 저보다 인간이 먼저 죽으면 좀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소리를 하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인간이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내가 알 바는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죽습니다. 고양이도 태어나면 죽습니다. 개도 태어나면 죽습니다. 사실 고양이보다 열등한 짐승 이야기는 거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죠. 뭐, 개 정도는 저도 한 등급 낮은 동료 정도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개를 키우는 인간이라고요? 기분이 나쁘다고요?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 고양이는 스스로를 낮추는 법이 없습니다. 받아들이세요.
그래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책을 여는 첫 글부터 눈물 나게 왜 죽음 이야기냐고요? 어쩔 도리 없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열일곱 살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열다섯 살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저는 평균 수명을 이미 넘어섰습니다. 언젠가는 죽겠죠. 슬프냐고요? 고양이는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건 열등한 동물이나 하는 짓이죠. 네. 인간 말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인간은 요즘 따라 눈빛이 좀 이상합니다. 모든 행동이 좀 과합니다. 제가 기침이라도 하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침대 정도는 충분히 뛰어오를 수 있는데도 침대 옆에 높은 방석을 깔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가 열일곱이 넘으면 관절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저의 육체적 능력을 무시하는 행동이지만 이 정도는 예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인간이 더 걱정입니다. 몇 년 전엔 몇 달이나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누워서 허공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정말이지 나약합니다. 우울증이라니. 고양이는 그런 하찮은 병 따위 앓지 않습니다. 걱정은 했습니다. 아파트 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죽을까” 따위 말을 내뱉기 시작하더군요. 이대로 가다간 제가 굶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이 인간이 살아야 맛없는 사료라도 계속 받아먹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화장실은 또 누가 치워준답니까. 청소는 또 누가 합니까. 전 지저분한 건 질색입니다.
사실 저는 막 안기는 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 잠도 제 방에서 따로 자는 걸 선호하는 독립적인 지성묘였죠. 더는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그놈의 우울증에서 이 인간이 빠져나올 때까지는 조금 덜 독립적이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있으면 옆에 가서 함께 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면 “네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화장실은 좀 치워야 하지 않겠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사료가 떨어질 것 같으면 “지금쯤 사료를 주문하지 않으면 모레쯤부터 나는 굶어야 할 것이다”라고 호령을 했습니다. 너무 씻지 않아서 냄새가 나면 옆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샤워를 하더라고요.
인간은 참 열등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물로 몸을 씻지 않으면 이틀만에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고양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자마자 이 인간은 또 가볍고 방정맞은 예전의 인간으로 돌아가더군요. 저를 쓸데없이 껴안고 “네 덕분에 내가 살았어” 따위 낯간지러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이 짓을 벌이는데 한심해 미칠 지경입니다. 저는 이 인간을 살리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 인간이 죽으면 제가 굶을 것이 걱정스러웠을 뿐입니다.
자꾸 인간들은 고양이에게 빙의를 합니다. 이 글도 고양이에게 빙의한 인간이 벌이는 수많은 희한한 짓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나약할까요.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밑바닥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납니다. 깨달은 듯해도 사람의 발은 여전히 땅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데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존재라고 하면 충분합니다.
고양이는 단순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습니다. 자고 싶으면 잡니다. 화가 나면 열심히 화를 냅니다. 울 때는 죽으라고 웁니다. 이런 칼럼처럼 쓸데 없는 글은 결코 쓰지 않습니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은 글이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두운 방에서나마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고양이들은 걷고 멈추고 앉고 눕는 일상, 똥을 싸고 오줌을 싸는 자잘한 일들이 모두 진정한 글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고양이를 걱정하는 일을 멈추는 게 낫겠습니다.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 우월한 존재를 인간 따위가 왜 걱정을 합니까. 저는 열일곱 고양이입니다. 늙은 고양이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겁니다. 곧 떠날지도 모릅니다.
이 인간이 하루는 저를 앉혀놓고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나는 그 이야기를 정말 좋아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지긋지긋한 이 인간을 천국에 가서 또 봐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마중을 왜 나갑니까. 고양이는 개가 아닙니다. 제가 있는 곳으로 인간이 먼저 찾아와야 하는 법입니다. 뭐, 꼭 만나기 싫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의 수명은 지적 열등함에 비해 지나치게 깁니다. 천국에서 몇십 년 놀다 보면 이 하찮은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제쯤 여기로 올까. 궁금하긴 할 겁니다. 그러니 마중까지는 나가지 않더라도 문 앞에서 기다리기는 할 겁니다. 안기는 건 여전히 귀찮겠지만 다리 사이로 몇 번 쓱 몸을 부딪치기는 할 겁니다.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뭐,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이 저에 빙의해서 쓰고 있는 이 글의 많은 단락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빌어온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인용하지 않으면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측은합니까.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합니까. 이 몸은 고양이입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성가신 짓을 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글을 쓸 시간이 있으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자겠습니다. 저는 열일곱 고양이입니다.
 |
| OhBoy! No.130 SEP OCT 2024 15th ANNIVERSARY 구매하기 |
김도훈
이 몸은 고양이입니다. 이름은 한솔로입니다. 이 인간은 저를 데려와서 '스타워즈' 캐릭터 이름을 붙이는 희한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2024년에는 한솔로가 누군지 아무도 모릅니다. MZ세대는 더 모릅니다. 다들 그냥 솔로라고 부릅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이 인간은 한 씨도 아닙니다. 흔한 김 씨입니다. 그러니 그냥 솔로라고 부르는 게 낫겠습니다. 저도 한솔로라고 불린 적은 별로 없습니다. 사실 솔로가 저에게 더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이 인간은 거의 십여 년째 솔로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제가 쓰고 있느냐. 아닙니다. 이 인간이 쓰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며칠을 징징대더니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흉내 내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만날 칼럼이나 써서 먹고사는 주제에 스스로를 문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기특합니다. 그딴 칼럼이나 써서 저를 17년째 먹여 살리고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먹여 살리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사실 제가 먹여 살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를 소재로 칼럼을 얼마나 많이 써재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아직도 캣닙 한 줌 값 정도 들어오는 인세는 다 제가 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참 작가란 편한 직업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작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매일 빈둥거리며 지내면서도 작가를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고양이라고 하지 못하란 법도 없겠습니다. 게다가 사십 대 인간이 고양이에 빙의해서 글을 쓰는 거 좀 낯간지러운 일이긴 합니다. 용서하죠 뭐. 나쓰메 소세키는 1867년에 태어나 1905년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하고 1916년에 죽었습니다. 마흔아홉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인간 나이가 지금 마흔아홉입니다. 설마 이걸 쓰고 죽진 않겠죠. 그러기에 저는 지나치게 건강합니다. 저보다 인간이 먼저 죽으면 좀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소리를 하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인간이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내가 알 바는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죽습니다. 고양이도 태어나면 죽습니다. 개도 태어나면 죽습니다. 사실 고양이보다 열등한 짐승 이야기는 거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죠. 뭐, 개 정도는 저도 한 등급 낮은 동료 정도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개를 키우는 인간이라고요? 기분이 나쁘다고요?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 고양이는 스스로를 낮추는 법이 없습니다. 받아들이세요.
그래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책을 여는 첫 글부터 눈물 나게 왜 죽음 이야기냐고요? 어쩔 도리 없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열일곱 살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열다섯 살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저는 평균 수명을 이미 넘어섰습니다. 언젠가는 죽겠죠. 슬프냐고요? 고양이는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건 열등한 동물이나 하는 짓이죠. 네. 인간 말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인간은 요즘 따라 눈빛이 좀 이상합니다. 모든 행동이 좀 과합니다. 제가 기침이라도 하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침대 정도는 충분히 뛰어오를 수 있는데도 침대 옆에 높은 방석을 깔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가 열일곱이 넘으면 관절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저의 육체적 능력을 무시하는 행동이지만 이 정도는 예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인간이 더 걱정입니다. 몇 년 전엔 몇 달이나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누워서 허공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정말이지 나약합니다. 우울증이라니. 고양이는 그런 하찮은 병 따위 앓지 않습니다. 걱정은 했습니다. 아파트 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죽을까” 따위 말을 내뱉기 시작하더군요. 이대로 가다간 제가 굶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이 인간이 살아야 맛없는 사료라도 계속 받아먹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화장실은 또 누가 치워준답니까. 청소는 또 누가 합니까. 전 지저분한 건 질색입니다.
사실 저는 막 안기는 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 잠도 제 방에서 따로 자는 걸 선호하는 독립적인 지성묘였죠. 더는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그놈의 우울증에서 이 인간이 빠져나올 때까지는 조금 덜 독립적이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허공을 바라보며 누워있으면 옆에 가서 함께 누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면 “네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화장실은 좀 치워야 하지 않겠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사료가 떨어질 것 같으면 “지금쯤 사료를 주문하지 않으면 모레쯤부터 나는 굶어야 할 것이다”라고 호령을 했습니다. 너무 씻지 않아서 냄새가 나면 옆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샤워를 하더라고요.
인간은 참 열등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물로 몸을 씻지 않으면 이틀만에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고양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자마자 이 인간은 또 가볍고 방정맞은 예전의 인간으로 돌아가더군요. 저를 쓸데없이 껴안고 “네 덕분에 내가 살았어” 따위 낯간지러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이 짓을 벌이는데 한심해 미칠 지경입니다. 저는 이 인간을 살리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 인간이 죽으면 제가 굶을 것이 걱정스러웠을 뿐입니다.
자꾸 인간들은 고양이에게 빙의를 합니다. 이 글도 고양이에게 빙의한 인간이 벌이는 수많은 희한한 짓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나약할까요.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밑바닥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납니다. 깨달은 듯해도 사람의 발은 여전히 땅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데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존재라고 하면 충분합니다.
고양이는 단순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습니다. 자고 싶으면 잡니다. 화가 나면 열심히 화를 냅니다. 울 때는 죽으라고 웁니다. 이런 칼럼처럼 쓸데 없는 글은 결코 쓰지 않습니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은 글이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두운 방에서나마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고양이들은 걷고 멈추고 앉고 눕는 일상, 똥을 싸고 오줌을 싸는 자잘한 일들이 모두 진정한 글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고양이를 걱정하는 일을 멈추는 게 낫겠습니다.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 우월한 존재를 인간 따위가 왜 걱정을 합니까. 저는 열일곱 고양이입니다. 늙은 고양이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겁니다. 곧 떠날지도 모릅니다.
이 인간이 하루는 저를 앉혀놓고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나는 그 이야기를 정말 좋아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지긋지긋한 이 인간을 천국에 가서 또 봐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마중을 왜 나갑니까. 고양이는 개가 아닙니다. 제가 있는 곳으로 인간이 먼저 찾아와야 하는 법입니다. 뭐, 꼭 만나기 싫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의 수명은 지적 열등함에 비해 지나치게 깁니다. 천국에서 몇십 년 놀다 보면 이 하찮은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제쯤 여기로 올까. 궁금하긴 할 겁니다. 그러니 마중까지는 나가지 않더라도 문 앞에서 기다리기는 할 겁니다. 안기는 건 여전히 귀찮겠지만 다리 사이로 몇 번 쓱 몸을 부딪치기는 할 겁니다.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뭐,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이 저에 빙의해서 쓰고 있는 이 글의 많은 단락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빌어온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인용하지 않으면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측은합니까.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합니까. 이 몸은 고양이입니다. 스스로를 연민하는 성가신 짓을 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글을 쓸 시간이 있으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자겠습니다. 저는 열일곱 고양이입니다.
OhBoy! No.130 SEP OCT 2024
구매하기15th ANNIVERS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