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정성과 열정이 가득한 사랑,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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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은영 대표(모스가든 Moss Garden)

디자인은 역사를 만든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커다란 풀숲을 만들 듯이 누군가의 열정과 정성이 담겨진 디자인은 아주 오랜 시간을 버티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삶의 질을 발전시킨다. 


정조대왕 열풍까지 일으키며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생각지도 못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로 한동안 마음이 애잔했던 나는 둘의 사랑이 싹트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마지막 장면을 연출했던 장소가 궁금하여 촬영지인 보성 ‘열화정’으로 향했다. 열화정은 한옥의 구조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먼 전라남도까지 내려가 촬영한 이유가 이해 됐다. 다른 한옥에 비해 아담하지만 오밀조밀 입체적이고 사랑스러운 건축물인 보성 ‘열화정’을 포함해 100년 넘은 고택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보성은 정조, 성덕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지만, 애틋하고 설레는 사랑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드라마가 끝나자 마자 그렇게 <옷소매 붉은 끝동 투어>를 떠난 나는 보성 다음으로 정조가 세손 시절에 행군 했다가 적의 공격을 받은 전주 향교로 향했다. 전주는 갈때마다 콩나물 국밥 먹고, 초코파이 사들고 한옥 마을 입구 정도만 어슬렁 보다 오던 곳이었지만 투어의 컨셉(?)에 맞게 촬영 장소만이 아니라 전주 이씨의 탄생 배경과 조선 왕조의 뿌리를 알기 위해 경기전까지 방문했다. 


이렇게 여행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디자인의 힘’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이다. 처음에야 정조 역의 이준호가 열연한 이산이 불화살을 쏘는 모습을 떠올리며 흥분했지만 잠시 후 건축물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붕의 모습과 처마 도리, 대들보와 서까래, 기와의 모양과 덧문의 모양까지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시대별 건축 양식이 존재하지만 각각의 선조들 또한 자신의 스타일이 있었을 것이고, 유행에 맞게 디자인도 달리 했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가 비슷한 듯 다르게 디자인 된 것에도 모두 이유와 사연이 있을 터.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인 어진도 보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잦은 침략과 전쟁으로 원본은 거의 불타고 남아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 하나로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을 그린 곤룡포의 디자인도 그러하지만 바닥과 배경에 있는 패턴이 아름다워 기함할 지경이었다. “이거 우리 나라 맞아? 모로코 아니야?” 여러가지 패턴은 아름다운 색상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패턴만 떼내어 보면 아라베스크문양과도 흡사해 보였다. 실제 행군에 쓰인 가마앞에 길게 늘어 선 미니어처 행군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각각의 계급에 맞는 의복은 모두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고, 스타일도 모두 달랐다. 왕의 어진을 모시는 신하들의 의복과 가마, 심지어는 말 등에 덮어 씌우는 장식물까지. 비록 지금은 미니어처로 밖에 볼 수 없지만 찬란했던 조선 왕조를 그려본다.


성경에 겨자씨 이야기가 있다. 땅에 뿌릴 때는 작은 씨앗이지만 햇빛을 받고 자라면 그 어떤 풀보다 커진다. 디자인이 그렇다. ‘순간은 영원하다’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디자인은 영원하다. 순간에 그려진 디자인은 이야기에 이야기를 더하며 시간 속에서 이어지고 지켜지며 세대를 넘어 사랑받게 된다. 루이비통의 모노그램이나 샤넬의 체인은 발명에 가까운 디자인이다. 스코틀랜드의 로잘린 성당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히틀러의 폭파 명령을 따르지 않고 떠나 지금까지 후세가 그 모습을 볼 수있다. 에펠탑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파리지엥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거대한 철덩어리를 욕하며 구스타프 에펠을 비난했고 기드 모파상은 자신의 집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도록 창문의 위치까지 바꿨지만 만국 박람회로 인해 전 세계에 그 모습이 알려지며 에펠은 파리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점차 자리 잡게 되었고, 지금은 파리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렇듯 디자인의 힘으로 시대를 넘나들면서 정체성을 지켜온 브랜드들이 있다. 제품력 이상으로 B.I나 심볼, 패키지 디자인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은 정성이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것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정성스레 만들어진 것은 누군가를 배려하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인내하며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단 제품만이 아니라 패키징 또한 마찬가지이다. 무엇이든 쉽게 버려지는 세상에서 패키징 조차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있다. 


요즘 즐겨 마시는 바차 BACHA 커피는 모로코의 100년 넘은 카페인 바차가 싱가포르에 진출하며 론칭한 커피 브랜드이다. 아직 정식 수입 전이지만 어떻게서든 바차 커피를 구해서 마시는 이유는 커피 찌꺼기가 3일이 가도 향이 날 정도로 좋은 맛도 있지만 패키지 디자인 때문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 오는 많은 사람들이 TWG의 티 제품을 선물로 사왔지만 요즘은 오렌지색 바차 커피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아름답고 이국적인 바차 커피 패키지는 ‘소확행’을 제대로 느끼게 하며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 전 나를 잠시나마 모로코로 보내 준다. 

사실 디자인은 여행 가이드와 같다. 역시 싱가포르의 프리미엄 차(Tea) 브랜드인 TWG 역시 B.I.의 중요성과 패키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멋지지 않아? 노란색 패키지의 TWG는 정말 누가 봐도 영국의 오랜 브랜드같아.”라는 나의 말에 싱가포르 친구가 발끈하며 말한다. “TWG는 싱가포르 브랜드야!” 1837년도에 나온 영국 혹은 프랑스 브랜드라 생각한 TWG가 사실 2008년도에 론칭한 10년 조금 넘은 브랜드라는 사실에 나는 매우 놀라 그럼 그 숫자는 뭐냐고 물었다. B.I에 있는 1837년도라는 숫자는 싱가포르가 차, 향신료 등귀한 식료품을 거래하는 무역항 역할을 시작하며 상공회의소가 설립된 년도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친구는 마치 자신이 TWG 오너가 된 것처럼 자랑스럽게 설명해주었다. 그야말로 요즘 트렌드 워드인 ‘스토리텔링’을 넣어 브랜드 이름을 디자인한 것이다. 굉장히 눈에 띠는 노란색 틴케이스와 종이패키지에 클래식한 디자인을 넣어 숫자가 결합하니 스코틀랜드 어딘가에서 시작된 유서깊은 브랜드가 돼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TWG의 차만이 아니라 틴케이스와 선물 상자까지 구매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티 브랜드가 아니라 럭셔리 브랜드입니다.”  창업자인 타하보쿠딥Taha Bouqdib의 말대로 영리한 디자인이 브랜드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탈리아의 화장품 브랜드 산타마리아노벨라(Santa Maria Nobella)는 디자인으로 인해 브랜드가 사라질 위기에서 되살아난 경우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에 의해 탄생한 산타마리아노벨라는 몇 백년을 지나 운영해 오다 점차 경영난에 허덕이며 문을 닫게 되었다. 이 때 기계 정비를 하러 갔던 기계공인 현재의 CEO, 에우제니오 알판데리는 수백년간 지켜온 전통을 지키면서도 정밀성을 더한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고 그 후 공동 경영자가 되어 산타마리아노벨라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시켰다. 한국에서는 톱스타가 사용하는 브랜드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사실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디자인의 패키지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랑받게 되어 지금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펭귄 북스는 또 어떤가. 나는 영국에 방문하면 꼭 빈티지부터 새롭게 출간된 책까지 펭귄 북스의 책을 구입한다. 집에 있는 앤티크 접시드레서(접시를 장식하는 장)에는 펭귄 북스의 아름다운 커버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한번은 지인이 놀라 묻는다. “너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이랑 루소 <사회계약>을 원서로 읽어?” 사실 원서를 줄줄 읽을 정도로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는 내가 펭귄 북스를 모으는 이유는 하나! 커버 디자인때문이다. 비싸고 무거운 양장본으로 보다 저렴하고 가볍게 들고 다니며 사람들이 더 많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펭귄북스.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알렌 레인은 ‘담배 한갑 가격인 6펜스 책’을 만들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가볍고 저렴한 책을 만들기로 했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실패를 예상했다. 그러나 알렌 레인이 목표를 위해 한 일은 유명 작가를 섭외하는 것과 동시에 혁신적인 커버 디자인으로 기존의 양장본과 차별화를 둔 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가죽 소재의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양장본 커버가 주류였지만 펭귄북스는 당시 신입 사원이었던 에드워드 영에게 펭귄 로고와 함께 3단 분할Triband방식의 커버 디자인을 의뢰했고 젊은 감각으로 디자인된 커버는 주변의 만류와는 달리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또한 표지 컬러에 따라 카테고리를 나누는 과감한 방식으로 다양한 독자를 확보하게 된다. 무인도에 펭귄이 홀로 떨어진 것 같은 디자인의 펭귄 북스 <로빈슨 크루소>는 정말로 사랑스럽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들고 다닐 때의 나의 삶은 즐거워 진다. 가방 속에서 아름다운 디자인의 책을 꺼내거나 책상 위에 놓여진 펭귄 북스책은 소소한 행복을 주기때문이다.


칫솔질할 때 선반에 놓인 쭈그러져 있지만 아름다운 마비스치약이나 딥티크의 향초까지 우리는 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누군가의 정성과 열정이 들어간 디자인을 보며 즐거워 한다. 이제 사람들은 품질만 보지 않고 이야기가 담겨진 디자인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길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디자인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와 작은 행복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디자인은 허세를 버려야 한다. 참으로 희한한 것이 속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디자인은 그 생명력이 길지 않다. 디자인은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기뻐하고, 나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 주기를 원하며 탄생한 것이 바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나이키의 생명력은 ‘JUST DO IT’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시대에 맞게 유동적으로 발전하는 디자인의 힘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인생에 활력을 주고, 스타일을 주고, 철학을 주는 순간의 디자인이야말로 영원으로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 서은영 


* 기사 전문은 OhBoy! No.114 ‘MY FAVORITE THING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hBoy! No.114 JAN FEB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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